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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밤 읽던 책을 덮고 화장실에 가야만 했다.
언제나처럼 밤 늦게까지 깨어있을 때는 물을 잔뜩 마신다.
물을 잔뜩 마신다고 해봐야 다음 날 얼굴이 좀 더 부어있거나
화장실을 한두번(많게는 서너번) 더 가면 될 뿐이다.
그렇지만 어제밤에는 물을 많이 마신 것을 후회했다.
나는 책을 내려 책 뒤에 있는 사물들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는 혹시라도 내가 거울을 보게 될까봐
숨을 죽이고 애써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겨우 화장실을 나설 수 있었을 때, 나는 재빨리 침대로 달려갔다.
내 방 불을 끄는 것을 잊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어
어둠을 맞이했고, 어둠을 맞은 후에는 안경을 집어던지다시피
책상 위에 놓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어떻게든 야한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 내가 두려워하는 그 무엇만 아니면
어떤 생각이든 괜찮았다.
여기까지가 어제밤의 이야기다.
공포소설의 제왕(horror king)이라 불리는 스티븐 킹의 소설,
'샤이닝(the shining)을 불과 백오십여 페이지 남겼던 그때
나는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집 안에서 오직 나 혼자만 깨어있고
동생의 컴퓨터 종료음이 30분 전에 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나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부끄럽지만 모두 사실이다.
그리고 책을 막 덮은 지금까지도 실은 등 뒤에 무언가 있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사실 공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지는 몇 주 전부터다.
스티븐 킹을 읽기 전부터였으니, 공포에 대한 나의 관심이
스티븐 킹을 읽도록 부추겼다는 의심도 든다.
아니면 그의 소설 내용처럼 어떤 무언가가 나에게 독서를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주 내내 공포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개입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공포와 두려움은 다른 것이다. 두려움은 언제나
미래의 무엇에 대한 불안이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에 대한 걱정인 것이다.
그러나 공포는 훨씬 안쪽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무의식에서 꺼내온 과거와 미래의 상념들이 뒤섞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비싼 도자기를 깬 후 아버지에게
혼날까봐 걱정하는 아이는 두려움을 느낄 뿐이다.
아버지가 혼낼 것이다, 때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전히
두려움의 차원에 있는 것이고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지배하면 그것은
공포가 된다. 자연스럽게 논리에 따라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활개치기 시작한 기억과 무의식이 하나의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뚜렷한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아이는 멀쩡한 도자기 앞에 서 있다.
갑자기 도자기를 깼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죽도록 때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혹은 (그리고 동시에 일수도 있다) 자신이 몸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도자기가 깨어지는 것을 상상한다.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 반복될 것이다.
그런 기억 혹은 예감이 아이를 지배하게 되고, 아이는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낀다. 그래, 공포다.
어렸을 적에는 이번처럼 공포를 느낀 적이 많았다.
에일리언2를 봤던 날은 도저히 혼자 잠들 수가 없어서
부모님 침대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잤다.
아이들은 현실원칙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아직 체계가 파악되지 않은 현실로부터 벗어난 상상과 이미지의
세계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어른이 된 지금은
불안해하지 않는 그런 사소한 것들은 의식 혹은 무의식 내에서
순식간에 거대하게 자라나 공포가 된다.
내가(혹은 우리가) 공포를 잊게 되고, 열려있는 창문에서
죽은 자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더이상 걱정하지
않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실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 파악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창문 틈으로
무언가를 볼 것이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귀신 따위는 없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창문을 수백 수천번 불안에 떨며
바라보았는데도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포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는 불안이다.
(그리고 그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일은 우리를 해칠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불안이다.)
따라서 우리를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이 무서워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없다.
(혹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면 스티븐 킹의 소설이 무서운 것은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혹은
환경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비정상은 우리를 놀래킨다.
설사 그것이 소설이나 영화 속의 일들이라 해도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우리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실제로도 우리가 지금 있는 환경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초능력이 등장하기도 하고
귀신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니면 적어도 정신병자 정도는 등장한다(미저리).
그러나 일단은 우리를 그 세계 속으로 옮겨 놓기 위하여
배경에 대해 충실히 설명하고 묘사한다.
우리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배경 속에 충분히 녹아들고
상황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아주 충분히
녹아든 그 때 환상 혹은 비정상적 세계가 개입한다.
그렇지만 이런 새로 개입된 거짓 현실은 스티븐 킹 혼자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공포란 것은 우리 무의식의
불안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공포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의식의 외피 아래 숨어있던 공포는 작가가 만들어 주는
적절히 얇아진 외피를 통해 현실로 스며든다.
공포란 것은 참으로 불쾌한 경험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포소설을
읽고 롤러코스터를 탄다.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을 직면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공포를 향한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그 욕구를 만들어내는 것은 너무도 두터워진 현실원칙의 굳건한
외피다. 눌려있던 무의식은 터져나오려 발버둥 친다.
결국 우리는 공포를 향해 내달린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기억과 다른 공포의 이미지를 갖는데도
그의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공포 그 자체는 하나의 원형으로
모두에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기억과 지식 혹은 정보에 따라
그 이미지는 달라지겠지만 공포란 것은 무의식 내에 있는 하나의
원형으로서 마치 생명과도 같이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공포란 생명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공포를 느낀다.
가끔 불안, 두려움이 광적으로 증폭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아까 등장한 가상의 아이가 도자기만 봐도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아버지를 괴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때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과장되어
무의식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공포로 변환된 것이다.
이런 공포로의 변환은 이미 하나의 정신질환이며
공포의 대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변환되는 경우 증세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란 존재가 언제나 집단적으로 불안을 앓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과학기술과 이성이 지배할수록 공포에 대한 욕구는
더욱 크게 솟아나는데, 그 욕구가 변형되어 현실에 개입하는 것을
우리는 광기라고 부른다. 이 광기는 인간이란 집단 전체에 날이
갈수록 빠르게 스며들고 있어서 우리는 언젠가 '악'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하나의 원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완전하고 본질적인 '생명' 그것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그곳을 향해 우리는 지금 미친듯이 돌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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