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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일요일의 약혼'이란 세바스티앙 자프리죠의 소설이 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번역된 제목은 마음에 든다.
그의 대표작 '신데렐라의 함정'은 좋은 글이었다.
그러나 제목만으로는 '아주 긴 일요일의 약혼'이 더 좋다.
그리고 오늘 내가 딱 그 짝이었으므로 이런 제목으로 시작한다.
유레일 패스와 국제학생증을 하러 종로 3가에 갔다.
이 거리는 언제가도 익숙하고 언제가도 어색하다.
이제와 새삼 생각날 이유도 없다. 등록해놓고 한 번 갔던
파고다 학원을 지나쳐놓고도 아무 생각도 안 했다.
다만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더라.
짜증나게도 여전히 삼천원인 김떡순(김밥 떡볶이 순대;;)과
만남의 광장마냥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 가게는
별다른 추억도 없는데 짜증만 나더라.
정확히 말하면 별다른 추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 3년 전 연애 따위는 잊기로 한지 오래.
유레일 패스를 하러 간 여행사 건물은 내가 태어나서 타 본
엘리베이터 중 최악의 엘리베이터를 갖고 있었고
내가 간 여행사는 직원 네 명의 FineAV란 오디오 회사 다음으로
적은 다섯 명의 직원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 나는 현금으로 계산한 덕에 무려 3천원을 할인했다.
어제 뽑은 50만원 중 수표로 네 장을 뽑았는데
단번에 수표 네 장을 건네고 만원 짜리 한 장을 돌려받으니
기분이 정말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리고 동대문으로 달려가 인선이를 기다리다가 어처구니 없이 붙잡혀
주인이 3만 6천원을 부른 바지를 2만 5천원에 사고
이제는 절대 안 붙잡히겠다 다짐하고 돌아선 코너에서 바로 붙잡혀
역시 3만 6천원 짜리 니트를 2만 2천원에 샀다.
(대체 애초에 얼마를 남겨먹으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
별로 살 마음이 없었길래 아무 생각 없이 부른 가격 덕에
'손님은 쇼핑의 황제세요'라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
터무니 없이 물건을 빨리 사버린 덕에 인선이를 을지로 4가에
묶어 두고 대충 운동화를 사고 시청으로 이동.
길거리에서 시간을 버렸다.
원래 만나려던 허인선, 송준씨와 만나고 예정에 없이 합류한
(반갑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박재한씨와 또 방황.
오랜만에 도가니 수육을 먹었다. 생각해보면 평소에는
절대 안 먹는 메뉴인데 왜 먹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소주 세 병을 마셔도 안 먹을 선지까지 먹은 거 보면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나보다. 아무튼 넷이서 소주 네 병을
까고 준이형과 나는 비교적 조금 더 마신 상태에서
2차로 이동.
대동 골벵이 집에서 회식을 너무 많이 해 싫다는 재한이형 말에 따라
바로 옆집으로 갔다. 우리에게 도전 정신 따위는 없다.
적절한 자기변명과 현실도피만이 있을 뿐.
여기서는 달랑 두 병을 마셨다. 갈수록 마시는 사람은 마시고
안 마시는 사람은 안 마시는 분위기.
다음 날 학교에 가야한다는 재한이형은 오늘의 주빈 송준씨를
집에 보내려고 노력했고 허인선은 방관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어차피 차가 끊겼기 때문에 보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버스정류장 쪽으로 가는 동안 나는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를 흥얼 거렸다.
(우리는 시청 역에서 만났다)
송준 씨가 따라 부르면서 결국 중창이 됐고 나머지 두 사람이
외면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 노래를 최소 다섯 번 불렀다.
(내가 가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긴 하지만 1절 밖에 몰랐다)
옆에 사람들이 지나가면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우리는 원래 이런 식이므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술 취한 송준 씨는 집에 가지 않으려고 했고
나는 허인선과 원래 계획한 바 대로 준이 형을 시청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만나기 전 인선이와 나는 방황하다가 본의 아니게 시청 앞 광장
스케이트장 개장식을 하던 순간 그 옆을 지나갔는데 나중에
커피를 마시며 다음과 같은 논리에 따라 불필요한 결의를 했다.
'송준씨는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한다.
특히 주인공 두 사람이 빙판에 드러누워 있는 장면을 좋아한다.
시청 앞 광장에는 빙판이 있다.
영화와 빙판에 대한 암시를 심어주면 송준씨는 알아서 드러누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계획이었으나 그다지 암시를 심어줄 만큼
술을 조금 마시지는 못한 우리였기에 계획을 술술 다 불은 후였고
송준씨는 이제 '눕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한 후였기에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대신 우리는 가겠다던 재한이형을
끌고 3차를 갔다. 그러나 송준씨는 한 잔을 마시고 뻗었고,
인선이는 두 잔을 마시고 머리를 박았고, 집에 가겠다던
박재한 씨는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그냥 술만 먹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 줄은 몰랐다.
확실히 간은 훈련되면 될수록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
언제나 우리의 간을 시험에 들게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 심장을 불쌍히 여겼던만큼 간이나 폐를 불쌍히
여기지는 않는다. 다 뿌린만큼 거두는 법.
물론 간과 폐과 뭘 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건 그런 것이다.
나와서 길을 건너 송준 씨를 택시 태워보내고
다시 길을 건너 나머지 두 사람도 보내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택시비를 아껴보겠다는 정신나간 계획 하에.
우연히 24시간 하는 맥도날드에 들어가서 베이컨 치즈 버거를 먹고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동대입구까지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면 할 수 없는 짓이다.
가는 길에 종로 3가를 같이 걷던 사람이 생각났고
조금만 옆길로 새면 그쪽에 사는 사람이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두 번 울컥했다.
처음에는 혼자 종로 3가를 걷다가 울컥했는데
종로 3가에서 언제나 내가 기다리거나 나를 기다리거나 했던
나리 누나 때문이 결코 아니었고 무릎이 미친듯이 시렸기 때문이었다.
평소 때라면 금세 가라앉고 마는 통증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끝없이 아파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이없게도 은석이 생각을 하다보니 통증이 사라져서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었다....하하하하하.....
재한이형 경영대 대학원 떨어졌을 때 인욱이 형이
그랬던 것처럼 웃어야지 뭐.
그러고보면 오늘 다들 서로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을 이야기를
건드렸다. 그와중에 나는 군대 이야기로 충분한 피학적 쾌감을 얻었다.
그리고 빌어먹을 나와는 아무 짝에도 상관없어야 마땅할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할 거냐 서로 물으며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집에 있을 거라고 당당히 이야기했다.
떳떳할 것 없어도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아무튼 간에 정말로 유쾌한 모임이다.
그리고 동대입구로 가면서 전화를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울컥했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라 전화해도
받았을리 없겠지만, 연락하지 말라고 내 입으로 말해놓고
뻔뻔하게 내가 전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원래 뻔뻔한 것은 인간의 훌륭한 덕목이라고
자기변명 차 인정하고 있는 나라도 그렇게까지 뻔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내게 필요한 것은 통화하거나
택시를 타고 달려가(물론 정말로 달릴 리는 없다) 만날
상대였지 내게 무의미한 약속을 던지는 상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동대입구에 도착하니 오전 3시 30분. 두 시간만 지나면
첫 차가 다니니까 게임방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 너무 멀쩡한 내가 싫어서 편의점에 들러 버드와이저 한 병을
샀다. 알바 학생에게 물어보니 근처에 게임방은 없단다.
동국대 사회대학원 앞에서 맥주를 깠다.
하드커버로 장정이 된 아이작 아시모프의 '흰눈 사이로 달리는 기분'
이라는 책을 깔고 앉았다. 원래 아자젤이란 제목인데 대체
어떤 인간이 번역본 제목을 달았는지 모르겠다.
'그린 가의 살인사건'을 '초록색 살인사건'이라고 번역한
어떤 선배 이후 최고의 번역 개그.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맥주를 마시는데 들려오는 노래들도 가관이다.
공일오비의 '동부이촌동 새벽'은 모르는 노래다.
최근 나온 7집 빼고는 다 있는데 대체 언제 나온 노래인지 모르겠다.
이어서 나온 이승환의 '좋은 날'은 나리 누나 덕에 들은 노래다.
그 다음에 나온 라벨의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때나 유쾌하지 없으면 불쾌한 음악.
결국 나는 두 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정확히 말하면 맥주를 마시던 그때 너무도 울적해서
어떤 말이라도 이렇게 쏟아내고 싶었기에 택시를 탔다.
그런데 집에 오니 역시나 별로 하고픈 말이 없다.
(물론 이런 말을 하기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길게 적었지만
애초에 적고팠던 그런 기분들은 전혀 서술되지 못했다)
택시를 타기 전 기분대로 끄적이기는 하지만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
끊임없이 욕을 해대던 택시 기사 아저씨도
동대입구 지하철 역 아래에서 벽을 붙잡고 졸던 아저씨도
이제는 다시 만날 일 없는 무의미한 순간의 지나침일 뿐.
물론 시청 역 지하에서 내가 지나친 노숙자 아저씨들은
내가 3년 전 만난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끓인 물을 가져다 주고 빵을 건네주고 이야기를 건네던
사림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역시 아무 의미도 없다.
결국 길고 길었던 금요일의 방황은
술에 취하지도 못하고 이런 무의미한 글을 적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나 홀로 걷기 시작했던 그 이후로 그 아무라도 내게
전화를 걸어주었더라면 나는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혼자 걸었고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왔고
혼자 이런 글을 쓴다.
무릎이 시렸던 만큼도 가슴 시려하지 못하는 나는
대체 어떻게 아직도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배고프다니까 바로 부엌에 가서 떡볶이를 만드는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어느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새벽,
그렇지만 떡볶이를 즐겁게 만드는 그 아내 쪽이 훨씬
부러운 그런 새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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