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78 　4/20

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fictionary #4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中 -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라는 이름에 대해 적은 이 문장이 갑자기
생각나서 네 이름을 발음해 본다. 생각해보면 네 이름을 불러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네 이름도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는지 확인하려고
열 번쯤 반복해 발음하고 보니 숨이 찬다. 그러다 롤리타란 이름이
정말로 세 단계의 여행으로 이끄는지 확인하기 위해 '롤리타'도
발음해 본다. 롤리타. 롤리타. 롤리타. 그 이름이 상징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반복해 발음해 볼수록 어쩐지 에로틱한 이름인 것 같다.
음란한 건 험버트 험버트가 아니라 롤리타였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네 이름을 발음해 보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하지 않는다.
물론 네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던지는 말들에 내 나름의 방법으로
대답하고 있기는 하지만. 네가 얼굴을 마주하고 내가 듣고픈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절대로 아니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먼저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왜냐면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언제 정해지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네 이름을 연습삼아 몇 번 더 발음해보다가 이번엔 내 이름을 발음해 본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익숙한 내 이름이 꽤나 발음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음할 때 입모양이 그렇게 우아한 이름이 아니란 것을 덕분에 깨닫는다.

사실 이름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존재를 지칭하는 대명사일 뿐이다.
물론 대상의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이름 또한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조차도 내가 인식하는 대상의 본질의 이미지를
투영한 것일 뿐 이름 그 자체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루이스 캐롤도 거울 나라의 앨리스 마지막에
앨리스의 풀네임 첫글자들로 앨리스와 함께한 모든 추억을 담은
아름다운 시를 하나 남겼다.

만약 우리가 오래 함께 한다면 나도 그럴 것이다.
이름 그 자체에 아무 의미가 없을 지라도 아마 그러고 싶어질테니까.

어쨌거나 나는 오늘 두 번 거짓말을 했다.
진실을 말하고파 입이 근질거렸지만 말이다.


236	전망 좋은 방	Giverny	2011/02/06	353

235	어른	Giverny	2010/12/22	451

234	오랜만에 끄적끄적 [1]	Giverny	2010/10/24	420

233	용서하소서	Giverny	2010/07/06	421

232	white out	Giverny	2010/07/01	352

231	책	Giverny	2010/05/16	472

230	월드컵, 광우병, 노무현 [2]	Giverny	2010/05/16	451

229	fictionary #0	Giverny	2010/04/06	440

228	fictionary #5 [2]	Giverny	2010/04/04	398

	fictionary #4	Giverny	2010/04/04	406

226	la vie quotidienne [3]	Giverny	2010/04/02	406

225	아주 작은 의미	Giverny	2010/03/28	410

224	la honte	Giverny	2010/03/01	421

223	오! 사랑	Giverny	2010/02/22	398

[1][2][3] 4 [5][6][7][8][9][10]..[2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