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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3일째부터.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출발일 아침에 안 좋은 꿈을 꾸고
공항버스 아저씨는 카드 찍는 걸 못 봤다며 다시 찍으라고 해서
결국 카드가 두 번 찍히고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여행책자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이 재미없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견딜 수 없이 사람들이 싫어지는 것 역시 자주 있는 일이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살아가며 처음 있었던 일이다.
어딘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을 때 벌써 떠났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상상도 못했던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야
서둘러 비행기 표를 끊고 그렇게 후쿠오카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첫 방문지부터 길을 잘못들어 5분이면 가는 곳을 엉뚱하게
산을 타고 올라가 한 시간을 헤매게 되었다.
한참을 가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 반대로 돌아 올라왔던 길을
찾았는데 올라왔던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가는 길에
어떤 스님이 랩보다 빠르게 불경을 외는 모습을 보았는데
사진을 찍고팠지만 셔터 소리가 방해가 될까봐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 중 갑자기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갔지만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눈은 계속 쌓여만 갔다.
반쯤 절망하던 차에 아까 보았던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스님은 20대 중반쯤 되는 비구니였는데
영어도 잘하고 인상도 귀여운 그런 스님이었다.
스님 덕분에 무사히 길을 내려올 수 있었고
그 스님이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주던
그 순간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남은 시간도 평탄치는 않았다.
첫 날 밤엔 한국인 두 명이 새벽 2시에 들어와 술에 취해 떠들어 대고
4시에는 한 일본인의 알람이 울려 '오키테 쿠다사이'를 백 번은 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보다도 훨씬 일찍 일어나 버스 터미널에 가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폭설 때문에 버스가 취소가 되었고, 여행책자가 없던 탓에
기차 출발지를 헷갈려 두 번이나 세 정거장 거리의 터미널들을 오가야 했다.
겨우 도착한 두 번째 방문지에서도 추위에 떠느라 카메라는 꺼낼 생각도 못하고
잠시 머물다가 오후에 들른 야나가와에서 유유자적 뱃놀이를 하며
처음으로 여유라는 것을 찾았다.
그렇게 둘째 날까지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는데
마지막 날에 가서야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다.
여행은 셋째 날부터.
첫째 날은 현지에 적응하느라
둘째 날은 여기저기 다니며 몸이 피곤해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여유가 없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몸이 피곤해질 대로 피곤해진
셋째 날부터에서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미얀마에 갔을 때도 그랬던 것이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 세 번째 날은 마지막날이기도 했지만
셋째 날 갈 곳을 둘째 날 간 덕에 마지막 날은 여유가 많았다.
해변을 걸으며, 시장에서 고로케를 사먹으며,
온갖 백화점 식품코너는 헤집고 다니며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잡고자 했던 이 혼란의 실마리가 아니라
오기 전에 꿈을 꿨던 유미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 내가 지나쳐온 것에 대해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리움보다 미움으로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난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고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를 미워하는 이유는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도,
관계에서 마음이란 것을 배신한 것은 결코 내가 아니라 그 아이란 결론도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다만 내가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는 만큼 그 아이를 더 받아줄 수 없었던 걸까,
나이 차이만큼 더 여유있게 대할 수는 없었던 걸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때의 나는 그 아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깨달음이었다.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조차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나였으니까
내가 했던 잘못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던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거 아닐까.
그러니까 결국 그때의 내겐 관계를 지켜낼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편해진 마음으로 정말 신나게 음식들을 구경했다.
처음으로 시간에도, 돈에도, 기분에도 구애받지 않고
맛있는 음식들 사이를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내 마음 속에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깨닫게 됐다.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예쁜 것을 봤을 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오른다.
여행은 그런 거다.
내가 찾고자 하는 답 같은 건 찾아지지 않는다.
지난 번 미얀마 여행에서는 답 대신 질문을 찾을 수 있었고
이번 후쿠오카 여행에서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전 두 번의 여행은 내 평생 유이하게 여자친구가 있을 때
떠난 여행이었고, 내 평생 최악의 여행들이어서 얻은 것보단
잃은 것이 더 많지만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길을 찾아나간 것일 것이다.
요즘의 나는 정말 많이 망가져 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다녀 온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난 왜 항상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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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