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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내내 정성들여 촘촘히 짜여 보드랍게 펼쳐진 천은
형형색색으로 눈부시다. 때로는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때로는 로맨틱한 연인들의 입맞춤이,
때로는 따뜻한 초여름 풀밭 위의 한가한 가족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구체적 장면이 묘사된 것이 아니라
그저 제멋대로인 듯 하지만 묘하게도 서로 어울리는 굴곡과
섬세한 빛의 변화들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그대들이 한평생 자아낸 결과물이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자아라고 부르기로 한다.
일반적인 이성과 감성의 조합은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한쪽에서 강하게 잡아당기더라도 이내 또 놓고
반대쪽에서 다시 또 잡아당겨 오히려 더 촘촘해지고
때로 의도치 않게 흘려진 물감이라도 그것은 천천히 그리고
은은히 퍼져서 직조물을 망치기보다는 오히려 더 아름답게 만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그러나 결코 서로 완전히 같지는 않은 원숙한 결과물들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 아니 예술가의 자아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조금은 다른 과정을 겪는다.
잡아당겨지는 힘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강해서 찢겨나가기도 하고
놓치지 않기 위해 반대쪽에서 그만큼의 힘으로 강하게 붙잡던
손을 놓쳐 바닥의 흙먼지에 묻히기도 한다.
염색을 위한 물감은 천을 온통 적시기도 하고
도무지 의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룩을 남기기도 한다.
이성과 감정이 제멋대로 이끌어가 곳곳을 기워야만 하고
때로는 이성과 이성 사이에, 감정과 감정 사이의 싸움으로
또 새롭게 기워진 자국이 남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그렇게 제멋대로 기워지고 염색된 것일 뿐이라면
그것은 예술가의 자아가 아니라 광인의 자아일 것이다.
그 안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술가가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예술가에게서 서로 다른 자아를 본다.
자유롭게 물감을 뿌려대며 한 평생을 산 사람들,
여기저기 찢긴 곳을 정교하며 기워내려 한 사람들.
이성과 이성 사이에서 찢겨나간 자들은 대부분 철학자가 된다.
감정과 감정 사이에서 찢겨나간 자들은 대부분 화가나 음악가가 된다.
하지만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찢겨나간 자는 무엇도 되기 힘들고
그 싸움 사이에서 다시 또 분열된 이성들과 감정들의 더미 속에서
끝없이 올이 풀려나가면 정말 무엇도 되기 힘들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왜 하고 있는가 나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일들, 사람들, 삶 속에서 난 왜 만족하는가.
그리고 왜 갈망하기를 멈추고 타협하고자 하는가,
왜 타협하고자 마음먹고 여전히 또 몰래 그렇게 갈망하는가.
마치 정성들여 재차 씻어내리듯 돌아볼 때마다 내가 나일 수 있었던
이유들은 그토록 하나씩 현실에 걸러져버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왜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하는 건지
언젠가 모두가 좋아했던 글을 왜 한 문장 한 문장 해석해줘야 하는 건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는 것이 왜 되려 부끄러운 건지
쉽게 사랑하지 않으려 함이 쉽게 외로움에 몸을 맡기지 않으려 함이
왜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지, 왜 쉬운 삶이 더 행복한 건지 난 모른다.
고민은 반복되지만 던지는 질문은 달라진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란 질문은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로 바뀌고
다시 하나의 변명으로 바뀐 후
이제는 질문도 변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질문은 현실과 그 자리를 맞바꾼다.
나의 어렸을 적 꿈은 천체물리학자였고,
사춘기 시절 날 달랜 건 도가철학이었고,
사람들이 내게서 발견한 건 수학에 대한 재능이었다.
대학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 내가 가진 환경에 대한 죄책감과
환경, 빈곤에 대한 관심...그리고 좌파사상에 대한 소극적 투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시작된 첫 연애는
내게 소박하나마 글을 쓰는 재능도 조금은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어긋나 버린 건지도 모르고,
반대로 글마저 쓰지 않았더라면 또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이 반복되고,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고,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탄생이나, 맷 리들리의 붉은 여왕을 읽으며
내가 과학이 아니라 문학을 전공했음을 저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으며
문학을 전공했음에 수없이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막상 전공인 불문학 작품 중에는 좋아하는 작품이 없다.
한 번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우주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질문들은
SF나 추리소설 같은 장르 소설들이 함께 해주었다.
형이상학적 질문들, 본질에 대한 질문은 아무도 함께 나눠주지 않았기에
결국 내 방 책장에는 SF와 추리소설이 수백 권 쌓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SF와 추리소설은 가장 수준높은 지적유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위안에 가까웠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현대철학과 시는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언젠가 따뜻한 오후 풀밭에 드러누워 내 마음을 모두 맡긴 사람에게
도란도란 하게 될 거라 믿었던 이야기를 왜 갑자기 여기에 적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서른되는 해 생일, 어쩌면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란 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난 내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아야겠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써야겠고,
내가 바라는 것이 존재한다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읽고 쓰고
고민하고 버티면서 조심스레 한 발 더 나아가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이성의 갈래와 감정의 갈래들이 끝없이 당겨내어
여기저기 기워낸 그 자국들에 이해를 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거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실상 나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마음껏 채색하는 동안에도 그저 기워내느라 바둥대야만 해도
이것이 내 삶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외롭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내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뿐이란 예감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매년 반복되는 분기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겁먹어서 먼저 손내밀 수가 없고
시간은 자꾸 나를 더 빨리 쫓는다.
오랜만에, 정말 너무나 오랜만에
누군가를 꼬옥 안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이제는 그 문장이 세 문장이 아니라 원래 한 문장이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에밀 아자르의 그 마지막 세 단어는 옳았다.
il faut aimer 사랑해야 한다.
나는 지금, 겨울에 태어나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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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여행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