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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로맹 가리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름을 적어보자면
도스토예프스키, 푸쉬킨, 나쓰메 소세키,
죠반니 과레스키, 이탈로 칼비노, 알프레드 베스터,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르귄, 데니스 루헤인 정도.

앞의 다섯 명은 순수문학 작가로 원래 유명하고
그 다음 두 명은 SF, 르귄 아줌마는 판타지,
데니스 루헤인은 추리소설 작가다.

그런데 거기에 로맹 가리가 들어간다.
인지도로 치자면 이 중에서 가장 낮은 편.
내가 기억하는 것만 적자면
로맹 가리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다.

로맹 가리.
프랑스의 소설가.
러시아계이고 공군 중위 출신.
생애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공쿠르 상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유일하게 두 번 받은 사람.
모델과 결혼하고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 죽은 사람.

내가 로맹 가리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 절망감.
나쓰메 소세키의 글이 그것을 그저 담담하게 보여준다면
로맹 가리의 글은 그것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씁쓸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것이 자기기만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인지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로맹 가리의 글을 재밌게 읽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로맹 가리 글을 읽는 사람 자체가 터무니 없이 적지만.

그와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공군 중위로 제대했다는 것밖에 없다.
나는 러시아계도 아니고 상은 한 번도 탈 듯 하지 않고
모델과 결혼할 일도 없다.
물론 아직 예비군이 6년이나 남아서 권총을 머리에 쏠지
안 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가장 쓰고 싶은 글은 로맹 가리 같은 글이다.
특이하게도 나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단편 '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작가가 글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보다
그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더 생각했던 것 같다.
까뮈와 아니 에르노 글을 읽을 때 특히 그랬다.
그립네, 눈부셨던 2005년 여름.
내 삶에서 유일하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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