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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이 길로 가세요

아직 감각들이 덜 깨어난 것 같지만 서서히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눈부셨던 2005년 여름, 이제 내겐 없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아이의 사진,
차마 말로 할 수 없어 처음으로 썼던 짧은 글, 지금도 왠지 모를 정도로
사랑받았다는 느낌의 군생활 그런 것들로 채워진 나는
예전에는 분명 항상 불안에 떨며 갸르릉 거리는 새끼 고양이 같았는데
이젠 어느새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확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터무니 없는 것들을 바랐고 또 지금도 바라고 있다.
영원을 바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삶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나는 언제나 남들보다 느리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래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도
그리고 현실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도,
현실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깨닫고 그 길을 선택하는 시점 마저도.

운이 좋았다.
나는 특이하기는 했지만 아주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고
현실적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살아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사실 남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여전히 갖고 있다.
운이 없었다.
남들이 진작에 버린 환상을 끝내 품고 살아가느라 고통스러웠고
현실에 몸담지 못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질 수 있었던 것을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행복이란 말을 감히 떠올리지 못했다.

영원과 현실을 끝없이 오가던 내 마음은 이제 가라앉아 지극히 현실적 삶에 안주한다.
나는 고통에서 멀어지는 길을
불안감이 잦아드는 길을
명확히 디딜 곳을 찾아 오래도록 헤매었다.
조심스러움은 자신감이 되고
불안한 마음은 떨림을 멈추고 나태란 옷을 입고
그 대가로 나는 글을 쓰는 대신 돈을 쓰게 됐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에 단단한 갑옷을 둘렀다.
처음으로 내 감정이 결코 다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세상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잊었다.

이 길로 가세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내가 택했고, 내가 갈 수밖에 없던 길이었다.
누군가 어떤 길로 가라고 했어도 어리숙한 반발심이 다른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도 존경해본 적이 없고, 그 누구도 우상으로 삼아본 적이 없다.
나는 인력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로부터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알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었던 그대로 나는 영원에 닿지 못한 채
현실로 현실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천천히 가라앉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그 무엇을 잡기 위해 노력해본 적 없던 그 대가로
오래도록 그랬던 것처럼 영원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번민하는 대신
나는 그저 그 사이에 놓인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밤을 맞는다 해도 공포대신 두 팔을 벌린 채 드러누워 자유를,
사람 가득 한 길거리에서 무심히 홀로 걷는 순간에도 고독대신 평온함을.
현실에 발디딛고 나아가는 것보다 언제나 두려워하던 그 부유가 더 행복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 길로 가세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이 말한다.
길 끝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정말로 그냥.
얼마나 좋은가, 그냥 하면 된다니. 그냥 해도 된다니.
그냥 이 순간이 좋고, 그냥 이런 말들이 하고 싶었다.
그냥 이렇게 있고 싶다. 그냥 이렇게 있는 게 그냥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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