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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는 분명 네 자리일테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 네 자리 숫자가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도 없다.
번호를 하나하나 손가락 끝으로 꾸욱 누르자 기계음이 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손잡이를 끝까지 돌리고 문을 끌어낸다.
확신에 찬 동작과 달리 사실 심장은 두근두근 뛴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만
마치 당장이라도 누군가 부엌 쪽에서 부를 것만 같은 느낌이다.
반면에 이유모를 생동감을 감안하면 움직이는 것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다.
집안에 무엇이 있고 없는지는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이 집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생소할 따름이다.
한 손으로 벽에 기댄 채 오른발 구두 앞축으로 왼발 구두 뒷축을 잡고
왼쪽 구두를 벗겨내며 살짝 아래를 내려다 본다.
아직 집안을 들여다 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습관 탓이다.
왼발 끝으로 역시 오른쪽 구두 뒷축을 잡고 남은 한 짝을 마저 벗겨낸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닥에 오른발을 내딛으며
(오른쪽 구두를 벗자마자 그 발을 내딛는 습관 때문이다)
익숙함과 생소함 중 어느쪽이 더 큰지 헷갈려 한다.
현관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꺾자 드디어 집의 구조가 보인다.
조금 들어가 왼쪽에는 다용도실이 있고, 조금 더 지나가면 거실이 보인다.
오른쪽에 넓게 뚫린 쪽은 분명 부엌일테고 깊숙한 복도 끝에 양쪽으로
방이 두 개 있음이 분명하다.
자, 이제 걸음을 더 옮기기 전에 무엇이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저 깊숙한 양쪽 방 중 하나는 분명 책이 가득 있는 서재일테고
다른 한쪽은 침대방일 거다. 어떤 침대가 놓여있을지는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상상해봐야 소용 없다. 그냥 하얗고 푹신푹신한 침대일지, 레이스가 달린
공주풍의 침대일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물침대나 돌침대일지도 모르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상상해보지 않았다는 건 어떤 것이 놓여있든
어차피 개의치 않을 거라는 것이니까.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기도 하니까.
어쨌든 나빠봐야 공주풍의 기둥 네개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침대일 거고
그 정도는 참을만하니까 어느 쪽일지는 모르지만 아마 오른쪽일 것 같은
서재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문고리가 닿는 벽을 제외한 세 개의 벽은 모두 책장으로 되어 있는데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으니까 분명 짙은색 목재로 된 책장일 것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책장인데 빈 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쩌면 빈 칸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선 채로 손을 뻗으면 있을 법한 위치에는 가장 좋아하는 책들이 놓여있을 것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 열린책들에서 나온 빨간 표지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중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과 죄와 벌 - 이건 그냥 나머지 전집과 함께 꽂혀있을 수도 있다
- 역시 열린책들에서 나온 이윤기 번역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로맹 가리 - 혹은 에밀 아자르 - 의 책 몇 권.
어슐러 르귄 아줌마와 로저 젤라즈니의 책도 몇 권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고 당연히 몽테뉴의 수상록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있다. 칼릴 지브란의 책은 너무 작아서 숨은 듯 보이겠지.
지금의 나는 모르는 책도 한 두권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그런 책들의 윗칸에는 프랑스 문학 작품들과 비평 관련 책들이 잔뜩 있다.
까뮈의 책들이 가장 많으니까 한두 칸 정도는 독점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마르셀 에메의 책들도 한 칸 정도는 차지할테지.
그리고 다시 두 칸을 내려가면 영문학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라든가(어쩌면 주석 달린 버젼이 대신 할지도 모르겠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라든가 하는 작품들 말이다.
물론 오 헨리의 책도 있을 것이다.
여태가지 얘기한 것은 문에서 가장 먼, 하지만 동선 상으로는 가장 편리한
위치에 놓인 벽면 쪽의 이야기고 다음으로는 그 오른쪽 벽에 있는 책장으로 가본다.
역시 손을 뻗으면 가장 가까운 칸에는 독일 문학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E.T.A. 호프만의 책들이 역시 가장 많고 토마스 만의 책도 있겠지.
게오르규나 레마르크도 함께 있을 거다.
그 위에는 신화 관련 책들이 놓여 있다.
호메로스부터 북유럽 신화, 불핀치 판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등.
그리고 이번에는 아랫 칸으로 간다.
추리소설들과 SF소설들이 드디어 이중의 감옥을 벗어나
가지런히 작가별로 놓여있을 터인데 분명 한 번은 솎아져 정말 괜찮은
작품들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벽면 세 개로는 모자를 것이니 말이다.
알프레드 베스터, 아서 C. 클라크, 데니스 루헤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할테고 이제 나머지는 어디에 놓이든 상관없다.
그냥 대충 국적별로, 장르별로, 작가별로 여기저기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작가들이 자신의 책이 어디에 놓였는지 안다면 불쾌할 것이 분명하지만
책들 사이에는 분명한 우열이 어느 정도 있고, 독자와의 궁합이란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대부분 버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남을 것이다)
의 책들이 어슐르 르 귄의 책보다 훨씬 잘 팔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마냥 불공평한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아무도 몰라주는 좋은 책들이
나름 마땅한 자리에 놓이는 서재일테니까.
서재는 이만하면 된 것 같다. 의자도 필요없고, 책상도 필요없고
새집 냄새와 섞인 퀘퀘한 종이 냄새만으로 방은 가득 차있을 것이다.
그럼 - 아, 드디어 - 부엌이다.
오븐이 있어야 하겠지만 사실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잘 보이는 곳에 놓인 에르메스 그릇 한 세트와 행켈 칼 세트,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상쾌해지는 주방세제 프릴 사과향이 놓인 싱크대 뿐이다.
부엌은 서재보다 구체적 형태를 띤 채로 오랜 시간 이미지가 존재해왔기 때문에
사실 서재보다 상상하기 더 쉬우면서도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식탁보가 놓이지 않은 하얀색 식탁과 의자 세트, 그릇이 들어있는 찬장,
와인으로 2/3쯤 채워놓은 와인냉장고, 맥주와 소주가 가득한 냉장고,
스테인레스로 된 후라이팬과 냄비들.
생각보다 구체적이지는 않다. 생각해보니 더 구체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있어야 할 것만 다 있으면 되니까. 그리고 중요한 건 설거지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실의 쇼파가 보이느냐 아니냐니까.
이제 거실로 가본다. 생각보다 부엌을 일찍 끝내버렸지만 부엌이 중요한 것은
일단은 시각보다는 미각과 후각 때문이니까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 분명하다.
거실에는 벽면 한 가운데 티비가 놓여있고, 그 양 옆으로는 스피커가 한 짝식
놓여있다. 스피커 사이 공간에는 낮은 서랍장이 있을 것이고, 전면이 유리로 된
창과 한쪽 스피커 사이에는 CD장이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 포레, 존 루터, 모짜르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뿔랑,
하이페츠, 루빈슈타인이 채워진 그 CD장이 과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매일 열릴까 생각해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낮은 서랍장 위에는 리락쿠마, 대나무를 든 곰돌이 푸우, 핸드폰에 다는 인형이
여러 개 놓여있을 것이고 여태 내가 재구성한 것 중 가장 이질적인 물건들이
아마 가장 많이 놓여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일단은 침실은 내버려둔 상태니까 말이다.
쇼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크기와 재질, 위치 등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 누워서 티비를 보다가 잠들 수 있을 정도로는 넓고
푹신푹신해야한다. 웬만한 쇼파에서는 다 가능한 일이니 역시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직 다용도실과 복도 역할을 하는 공간의 벽면, 장식장이 남아있지만
그런 공간들은 너무 난잡하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이제 원래 하려던 일을
해야할 때다.
현관에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으니까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지만 이런 때일수록 천천히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지나간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그건 언제나 머리 속에 있던 것이고 어차피 명확하게 떠올린다기 보다는
수없이 겹쳐져 그려진 이미지 중 뚜렷한 윤곽만을 따온 것이니만큼
그것을 떠올리는데 그것이 그려진 만큼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마치 밤새 꿨다고 생각한 꿈이 실은 그저 몇 초의 잔상인 것처럼.
그저 시간이란 것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잡을 만큼 빠르지 못할 뿐이다.
이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
짧은 복도 벽 위에 액자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장식장의 섬세한 문양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안에 놓인 여러 사진들과
기념품들 또한 천천히 형태를 갖춰가지만 아직 사진 속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굳이 떠올려 보았더라도 그런 색이었을리 없는
색깔로 벽지가 변해가고 조명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좀더 은은한 빛깔로
옅어져 간다.
아무 것도 없었을 것 같았던 거실 바닥에는 옷가지들이 아직 덜 마른 채로
건조한 공기를 향해 습기를 내뱉고 있고 이제 나는 자연스레 부엌으로
-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오른쪽일 것이다 - 향한다.
싱크대 위에는 역시 프릴 사과형이 놓여 있지만 개수구에는 음식물 쓰레기들이
모아져 있고, 설거지 해야할 그릇들이 물에 담겨져 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와 멸치볶음, 시금치 무침, 당근, 양파 같은 것들이 있다.
물론 맥주와 소주도 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있지는 않다.
이쯤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낀다.
쇼파 위에 누군가 있는 것 같지만 돌아볼 수도, 돌아볼 용기도 없다.
아직은 충분하지 않으니까.
찬장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잘 깨지지 않는 그릇들이 있다.
- 역시 에르메스 그릇을 매일 쓸 수는 없겠지 -
가스렌지 위에는 국물이 살짝 흘러넘친 자국이 보이는 냄비가 두 개,
그 옆으로는 국자와 물컵이 하나 있다.
와인냉장고를 열어 와인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부르고뉴 산은 고작 한 개가 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달콤한 와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쇼파 쪽은 돌아보지 않은 채 이제 살금살금 서재로 향한다.
예상대로 문은 열려 있다. 하지만 서재라고 생각한 공간은 한 면만이
책으로 가득하고 나머지 공간에는 옷들이 가득 걸려 있다.
다행히도 옷들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옷들이다. 가끔 아닌 것들도 있지만.
추리소설과 SF소설들이 보이지 않아 한참을 찾다가 그것들이
박스에 넣어진 채 다용도실 구석에서 구박받고 있을 것임을 깨닫는다.
거실 쇼파 쪽에서 삐걱소리가 나는 것 같다.
바로 거실로 향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에 서재를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 침실 문은 닫혀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화장대와 화장품들, 커다란 거울과 옷장.
사진이 들어있는 작은 액자들, 귀여운 스탠드 같은 것들이 있다.
왠지 모르게 설렘과 동시에 이질적인 기분을 느낀 탓에 살짝 몸을 떨고는
액자 속의 사진을 나도 모르게 보지만 여전히 사진은 흐릿할 뿐이다.
아까 본 사진들보다는 윤곽이 뚜렷하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는 없다.
이제 나는 다시 부엌으로 향한다. 거실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지만 놀라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며 뿔랑의 피아노 소품이 들려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떠들썩한 것을 보니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예능프로그램 소리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거실 쪽을 돌아볼 때는 아니다.
- 거의 다 왔어 -
이제 부엌 어디에 수저통이 있는지, 쟁반은 어느 찬장에 있는지
양념통은 몇 개가 있는지 알 것 같다.
나름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사뿐사뿐 옮기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귀찮고 짜증스런, 그러나 또한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묘하게도 동시에
몸 가득히 퍼지며 뒤섞인다.
싱크대 앞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앞치마를 두르고 빨간색 고무장갑을
낀 채(놀랍게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과향 프릴의
하얀색 뚜껑을 기세좋게 밀어올리고는 싱크대 안에 놓인 접시들을
하나하나 닦기 시작한다. 텔레비젼 소리는 어느새 더 커져 있고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네 번째로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며 이제 그 순간이 왔음을 깨닫는다.
거품이 가득 묻어있는 그릇을 든 손을 살짝 내린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마치 그 순간이 내가 유일하게 기다려온 순간인 것처럼,
내 안에 서서히 피어오르는 그 평화로운 기분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임을 다시금 깨달으면서,
존재의 시작도 끝도 마치 오직 그 순간 안에 놓여있었을 뿐인 것처럼.
- 오래 걸렸어, 생각했던 것보다 -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쇼파와 테이블, 장식품들로 가득한 거실.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누워서 텔레비젼을 바라보던 너는
- 다른 모든 것은 아직도 낯설지만 꼭 내가 생각했던 그런 무표정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너는 -
나머지 손으로 과자를 하나 집어 올리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턱을 올리며 내게 무슨 말인가 하지만 텔레비젼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고
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싱크대 안에 놓인 그릇의 거품을 닦아낸다.
이제 나는 처음으로 익숙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노래를 흥얼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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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여행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