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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도 봉사활동을 안 나간 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
같이 봉사활동하던 사람과 만나다 헤어져서 당분간은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말한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냥 귀찮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 결국 집 근처 시설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이유없이 그만두게 되었고 그런 지가 벌써 1년.
어렸을 적 나는 돈 쓰는 것을 무서워했다.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용돈을 잘 주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집에서 뭔가 구입할 때는
항상 몇 번이나 확인하고 가격을 비교하는 습성이 베인 탓도 컸다.
사실 그래서 지금도 언제나 내가 원하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저렴한 것을 구입하는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작년 말에 일본에 다녀오면서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잔뜩 사버렸다.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괜찮은 것 하나씩 가져도
될 것 같다는 이유였지만 어쨌거나 나는 명품 가방과 구두를
하나씩 가지게 됐다. 바로 몇 달 전 나는 타인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 먹어놓고는 말이다.
평소 나는 스키나 보드, 골프를 즐기지 않는 이유로
돈 드는 운동을 하면 그 돈이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해
삶을 이어가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말하곤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참 지저분한 핑계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나의 무뎌진 금전감각을 보면 나는 결코 그렇게
세심한 마음으로 살아오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며, 나이를 먹으며 현실 속에 살아가는 나를 본다.
물론 모르던 현실을 알게 되며 그것과 타협해 나갈 필요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착하지만은 않다고,
내가 원하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찾는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그에 어울리게 잘 나지 않았다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
그렇게 지금은 너무나 뻔한 사실들을 나는 20대 초반까지도 몰랐다.
그리고 20대 중반에는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20대의 마지막 해인 지금은 기꺼이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2008년 초 근무지를 정하기 직전 동기가 대놓고 빽을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러려고 했다. 성적으로는 내가 1등이었고
나는 순리대로 돌리려고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내 내가
하려했던 짓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일은 순리대로 풀려 나는 지금 이렇게 성남에서 근무하고 있다.
물론 그때 못된 마음을 먹은 대가로 애써 7개월 안 피우던 담배를
그때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만.
예전의 나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아무 고민없이 계속 봉사활동에 나가지 않는 것,
몇 십만원 짜리 물건을 사고 마냥 마음 편한 것,
줄을 대서 내게 유리하게 상황을 바꾸려 하는 것 모두 다.
그러나 아무리 옳고 아름다운 이상도 현실이 닿으면
그 빛이 퇴색된다. 그건 그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아등바등 해봐야 나이를 먹어가며
현실을 경험하며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다 보면 결국은
현실에 순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며 마음이 불편하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현실에 맞서고 있다고, 나는 진실을 품을 것이고,
이상을 위해 살아갈 것이며,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다.
나는 여전히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고 옳은 것을 생각하지만
내 중심축은 현실에 가까워져 있다.
만약 내가 꿈꾸던 이상이 100이고 현실이 0이라면
예전의 나는 100에서 30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70에서 0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여전히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 나는 기껏해야 70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 내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진하고 좋은 것들이다.
만약 그걸 막고 싶었다면 나는 처음부터 마음을 강하게 먹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사실 그럴 수 없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말한 핑계는 기껏해야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나를 다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징징댐 뿐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내게 그런 의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 내가 했던 것, 내가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내 중심축이 0에 가까워지는 속도를 늦추는 것뿐이다.
물론 나는 예전의 내가 좋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보다 예전의 나를 더 어여삐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로 추락함을 거부해야 하는 것의 당위성만큼이나
우리가 현실로 추락할 수밖에 없음 또한 당위성을 지닌다.
그것을 당당하게 거부하느냐 아니냐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만약 끝까지 거부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버텨내는 나라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물론 강한 의지로 처음부터 추락이 시작되는 것을 막았더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한 번 추락하기 시작하면 관성과 중력의 힘으로 그것을 돌이키기가
어렵다. 아주 강한 반대 방향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천천히 추락하자.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애초부터 순응하지 않았음에 후회할런지
아니면 너무 오래 버텼음에 후회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런 후회를 할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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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노란 고구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