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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fictionary #3

있어, 거기, 그대로.

마음 속이 감정들로 가득해지는 순간이 있어.
그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열망인지 허무인지,
진실인지 착각인지, 언젠가도 그랬었는지 또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여가도 결코 터뜨리지 못하는 건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나오는
그 순간 내 안에 가득한 것도 같이 빠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야.

현실에 살면서 환상을 그리든가
환상 속에 살면서 현실을 그렸더라면 좋을텐데
나는 아직도 그 사이에 놓여서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어.
내가 할 수 없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말은 너무나 쉬워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줄 알았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수천 번이나 반복했던 말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렸어.
그래서 이제는 언제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그 말을
나는 다시는 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그렇게 수천 번 해버렸던 시간 속에 갇혀버린 말들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그 순간에만 남아서 이제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내가 네게 주었지만 네가 갖지 않았고,
나는 잃어버려 다시는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서
만약 남아있다 하더라도 네겐 아무 것도 아닌 그 순간과
내게는 이제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사이에서
천천히 바스라지고 있을 뿐이야.

너무나 많은 일들이 쉽게 일어나 마치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내 친구가 여자 친구와 헤어졌어.
같이 일하던 분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
내가 몰던 트럭이 빙판길에 미끄러졌고
연락이 뜸하던 후배는 이번에 시험에 붙었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져서
사촌동생이 갑자기 사춘기를 맞아 키가 훌쩍 컸는데도
그냥 그럴 때가 됐다고만 생각했어.

나는 이제는 마음이 급해져서 조금은 공부를 하고 있어.
여전히 어떤 주말엔 약속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고
어떤 주말엔 만날 사람이 없어서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도 해.
머리가 길어서 주말에 자르려고 했는데 자르지 못했어.
예전보다 살이 조금 쪘지만 그래도 추워서 아직 운동하기는 싫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처럼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도 혼자 있어.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마음 속이 감정들로 가득 차 있는 그 순간만은.
그 감정들이 누구에게든 전해지기만 한다면,
그래서 모든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편히 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그렇게 착각하는 동안은.
이제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가 무엇을 또 실수하게 될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갖지 못하게 될지.

아직도 할 말이 많아. 하지 못한 말이 많아.
그렇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할 수 없는 말들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그냥 살아갈 거야. 네가 그렇듯이.
네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이미 언젠가 있었든, 언젠가 나타나게 되든
우리가 진실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작은 거짓조차 섞지 않고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게 되든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할 필요없게 되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이 닫히게 되는 그 순간 뿐이니까.

그러니까 있어, 거기,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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