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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빗소리

오늘 같은 날이면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나는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그래도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창문을 열어둔 채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있으면
은은한 습기의 향내와 규칙적이듯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후각이 둔하고 어렸을 적에는 음악도 전혀 듣지 않았던 나지만,
그저 책을 읽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엉뚱한 생각들로 소일하던 나였지만
그리고 비 오는 날을 죽도록 싫어하던 나였지만
그래도 그런 날이 그립다.

이제 나에게 빗소리는 너무도 익숙한 소리고,
후덥한 습기는 퇴근길 지친 내 몸을 더욱 무겁게 만들어 줄 뿐이며
향긋했던 내음은 내 입 가득 머금은 담배 연기 속에 묻히고 만다.

내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보다 더욱
그리운 것은 내가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아득히 먼 기억
저편의 시간들. 그리고 그보다 더욱 그리운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들.

내 공상 속에서 머물 수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고,
애써 나는 아직 순수하다 믿으며 잊고 싶은 일들을 겪어내고,
아름답지 못했던 이별과 웃으며 추억할 수 없는 기억들 속에서
나는 서서히 현실에 침식되어 간다.
나는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들을 열망하고,
내가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그것을 누리는 자들을 비난한다.
그리하여 나는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위선자로 남는다.
방탕하지만 행복한 삶을 나는 얼마나 바라왔던가.
아프되 슬프지 않고, 그리워하되 간절하지 않은 삶 속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얼마나 더 속여야 하는가.

삶에는 아름다움도 없고 추함도 없다.
도덕적 당위성도 없고 더러운 타락도 없다.
그저 빗소리와 그에 실려오는 풀내음이 있을 뿐이다.
그는 탕아고, 그녀는 창녀지만 나의 것보다 행복을 안겨주는
귀와 코를 지녔다. 그들은 비 오는 날에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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