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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옷장 정리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지 정확히 8년 만에 처음으로 옷장 정리를 했다.
옷이 낡고 마음에 안 들게 되어도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뒀지만
최근 옷을 많이 사서 정리가 안 되고
(사실 더 심각한 건 서재다. 서재도 모자라 내 방까지 책으로 가득 차버렸다)
결정적으로 작년 가을부터 살이 너무 빠져서 예전에 입던 옷들을
하나도 입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 옷들을 입게 되는 날이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묵은 옷을 정리하면서 내 체격이 이렇게나 달라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옷장 구석에는 2003년 생일에 선물받은 붉은 색 셔츠가 있는데
사실 그 셔츠는 두 번밖에 입지 않았다.
절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입고
싶지 않았지만 선물한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만날 때 정확히 두 번
입고 나간 것이 기억이 난다.
아니, 뻔뻔하게 '기억이 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히 기억한다.
혹시나 해서 다시 입어 봤는데 역시나...하나도 안 어울려.
어쨌거나 고마웠어. 내가 얼어죽기 직전까지 가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기를 바라.

까지 적고 몇 년 전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결혼하면 전화하기로
한 것이 기억 나서 헤어진 여자친구의 안부 따위에는 관심갖지 않는다는
종종 깨지는 철칙을 무시하고 블로그에 들러봤는데
적절한 타이밍으로 곧 결혼한다는 소식.
역시나 아무 느낌이 없다.
어떻게 살든 아무 느낌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들어가볼 여유가 있는 것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유일하게 그저 미안한 마음으로 헤어진
사람이기에 궁금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유일하게 내게 제대로 된 이별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기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유일하게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인 건가.
그리운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깔끔하게
마음에서 지워졌는데도 유일하게 미니홈피에 가끔 들르게 되는 사람.

아무튼 요즘은 작년이나 재작년 기억은 거의 떠올리지 않는다.
회상이나 후회라는 것은 올해 초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시간을
건너 뛰어 더 먼 과거로 향한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어느 순간이나
선택을 아쉬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에 안 드는 현실에 대한
가벼운 투정일 뿐이다.

굳이 시간을 되돌려 막고픈 나의 선택이 있다면
서울대 불문과 대신 다른 과를 택한다든가,
저주받은 대학 1학년 때 첫 연애를 저지한다든가(물론 불가항력이었다만),
대학원에 가는 대신 바로 입대를 택한다든가(그랬다면 이미 전역이었지 젠장)
하는 것 정도.
그러나 어쩌겠나. 그것도 나의 삶. 이미 지나간 시간의 흔적.

옷장 안의 옷들을 하나하나 보면 나름의 추억이 있기도 하다.
2004년 영어캠프 때 받았던 점퍼를 이제야 꺼냈고
내가 여름마다 즐겨입었던 노란색 반팔 셔츠도 결국엔 꺼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정리해야 할 것은 아직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내 노트북 안에 있는 사진들.
언젠가 동생에게 지워달라고 부탁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ㅡㅅㅡ
어쩌면 나는 노트북이 알아서 망가져서 백업도 못하고 하드를
포맷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전화가 오는 일 따위는 없겠지.
네가 전화할 아이였으면 애초에 그 날 헤어지지도 않았겠지.

갑자기 또 울컥.
예전 남자친구와 연락을 한다든가, 내 사진은 하나도 안 올린다든가
하는 분과 다시 만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랄 뿐.
(맹세코 다시는 용서나 이해없이 그 순간 바로 안녕이다)

나는 내 추억들을 복권시키기로 했다.
더이상은 누구처럼 비겁하게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난 언제나 최소한 현재의 나와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당당하니까.

Giverny

그냥 옷장을 정리했다..고 쓰려던 것이 길어졌네.

200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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