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유리판 위의 구슬처럼 감정은 그렇게 내 마음 위로 굴러간다.
내가 하는 생각들이,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마치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굶주리는 흑인 소년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고 굶주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고 내리쬐는 태양과
온몸을 찌르는 열기 그리고 상처투성이의 발바닥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언젠가처럼 예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읽는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그런 이야기를.
누구나 읽으면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생각할 그런 이야기를.
얼어버린 내 마음조차 녹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스쳐갔던 모든 이야기들이
내가 말했던 내가 적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거짓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바랐던 것과 내가 가장 바라지 않던 것이 있다.
내가 가장 바라지 않던 것을 이뤄야만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이
이뤄질 수 있음을 이제 나는 안다.
그리고 결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임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스스로를 위해 마련했던 수많은 변명들을 논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당당했더라면 조금 더 뻔뻔했더라면 생각한다.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다시금 기억의 어느 한 구석에 기대고픈 비겁함은 돋아나지
않을테니까.
이제는 안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게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사실들에 아무런 불만도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면 더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각오도 되어 있다. 이상하게도 조금도 억울하지 않다.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는 희미한 갈망과 기대마저
이대로 아스라져도 조금도 슬플 것 같지 않다.
나는 많은 설명들을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어떤 환경과 사건들이었으며
나를 즐겁고 아프게 만들었던 일들이 누구의 덕이며 누구의 탓이었는지
그 일들에 나에게는 얼만큼의 책임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세상은 어떤 식으로 흘러가며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하는지마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믿는지 내가 왜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정하려는 순간, 첫문장을 정하려는 순간
모든 것이 진부해져 아무 것도 쓸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너무 크게 바라보고 너무 크게 생각한다.
여전히 영원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허황된 꿈을 꾼다.
살아야할 삶과 살고싶은 삶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방황한다.
그리하여 그 어느 삶도 살아가지 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 모든 것의 간극에 놓여 그저 존재할 뿐이다.
답은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다.
지내온 삶이 보기를 만들면 누군가 그 중 하나를 정답이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없는 세상에 영원함이 없는 세상에
어찌 정답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답에 책임을 지는 누군가는 존재할지언정
어찌 단 하나의 진실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주인공의 이름을 말해주기를.
누군가 내게 첫문장을 대신 적어주기를.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과
내가 갖지못할 모든 것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내가 진심으로 후회할 수 있도록
내가 진심으로 갈망할 수 있도록. |
|
0
278 
7/20 
어느 날 문득 
확률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