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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진실

모든 것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수도없이 결심을 번복하곤 했다.

그것들은 어떠한 색도 가져선 안 되었고, 어떠한 향도 가질 수 없었으며
어떠한 형태도 띨 수 없었다. 단 하나라도 어떤 의미에서라도 규정되는
순간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이었다.
마치 길고 긴 완벽한 소설의 첫문장을 쓰는 순간 언어의 저속함에
숨이 막혀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한다 말하는 순간 부서질 것만 같은 그 감정처럼.

모든 것이 차차 형태를 갖춰갔다. 윤곽이 드러나고 색이 입혀지고
때로는 작은 속삭임 같은 소리가, 바람에 잠시 스쳐간 것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미한 내음이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워나갔다.
영원에 대한 갈망은 존재의 순간성에 침식당하고
진실에 대한 환상은 사실 그 무엇도 조금의 거짓이 섞여있다는
더욱 분명한 진실에, 삶의 대부분은 거짓으로 이뤄져 있다는
진리에 가까운 사실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름다운 환상이 누르고 있던 모든 욕망들이 차례로 고개를 들고
익숙해진 거짓의 모순들이 숙명이 되었고 세상을 물들였다.
모든 것이 경계에 놓여 있던 시절과 같은 스산한 바람 대신,
그 자리에 놓여 두려움에 울먹이던 나 대신
내 시선 너머 아른거리던 불확실하던 그 모든 것 대신
보다 분명하고 보다 진짜 같고 보다 손에 잡히는 것들이 자리를 채워나갔다.

그 모든 일이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어났다.
내가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었고
모든 것은 각자의 형태와 색을, 각자의 소리와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자 나는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 시작하자 나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구체적 진실은 거짓과 같고
현실적 삶은 존재만을 남기고 의미를 지웠다.
망각을 통한 사유가 욕망에 의한 행동으로 변질되었고
모든 진실이 현실에 뿌리 박고 본질을 잃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불안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던 그 때에는,
그리하여 모든 것들이 경계 위에서 아른 거리던 그 시절에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던 이야기들이
내가 말하고 네가 들음으로 인해서 진실일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지금의 구체적 현실 대신 하나의 삶일 수 있던 작은 원형이
이제는 오래된 전설이 되어 기억 속에 봉인되고야 말았다.

이제 네가 듣는다 해도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가 있을까,
그 전설 속 이야기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네게
보여준다고 해도 네가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이제 진실일 수 없는 공허한 이야기들에 네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그 말 말고 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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