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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寒月委庭
하늘이 차니 달은 뜰로 내려오네
- 서명인
아무 일도 없던 날들이 있었다.
아침에 깨어나면 마지막 꿈의 생생한 느낌이 하루를 결정한다.
때로는 며칠. 혹은 남은 삶 모두를 그렇게 할 것만 같다.
그런 날들에는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잊었어야 하는 이름이나
얼굴에 설레기도 하고 때론 그리워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요컨대 아무 것도 없는 날들, 현실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온갖 상상 혹은 망상 따위가 쉼없이 흩어지고 다시 모양을
그려내는 그런 날들에는 모든 이름과 모든 얼굴들이 나를 지나친다.
가끔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해도 그 순간 뿐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어느새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 이름, 다른 얼굴 혹은
사소한 말장난이나 아무 의미없는 흥얼거림 따위에.
하지만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얼굴과 마주하고 너무나도 생생하고
현실적인 일련의 이야기 속에 놓이게 되면 그때는 더이상 꿈 따위에
설레지 않는다. 다른 이름과 다른 얼굴은 현실이란 무게에 눌려
더이상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지극히 의미가 분명한 것이 되고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일상의 말로 환원된다.
오랜만에 끄적이는 글에는 예전처럼 '나'라는 주어가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가정을 할 필요도 없고,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하는 일,
내가 짊어져야할 몫을 분명히 알게 되면 그곳엔 더이상 '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삶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우리의 의지가
인내와 포기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오가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그래서 아주 짧은 시간일지라도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일어날
결과와 그에 따른 마음의 짐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분명해서
짐작할 수 없는 것은 그 무게 뿐이라면, 그 삶은 기계적인 것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그래서 '나'는 더이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스스로도 놀랄만큼 말이 없어질 때 혹은 말하는 것이 버거울 때,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말을 아끼고 혼자 짊어지는 자신을 볼 때,
나이를 먹어버렸구나 싶다. 어느새 현실을 온전히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되었구나 싶다.
어느새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어느새 굳이 멀리 바라보며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이 담겨 있든 간에
그저 내쉬는 한숨 한숨이 나를 강하게 단련시킬 뿐이다.
- 나를 더욱 차갑게 식힐 뿐이다.
내 삶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 뿐이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조금도 내 것 같지 않아
그 어느 때보다도 꿈 속에 놓인 듯 부유하는 그런 곳으로
나를 끌어내릴 뿐이다.
무엇을 했기 때문에 후회한다기 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아쉬워 해본다.
그 둘이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것은 아닌 듯 하다.
무슨 일을 했을 때 그 순간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삶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작은 부분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삶에 더이상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정말 두려운 것은 모든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져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아니라 그 고통의 모든 색채와 질감이 사라진 채
무게만이 남고, 또 그 무게에마저 익숙해져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나는 옛날 일을 떠올리며 울 수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스로에게 작은 변명을 선물하거나 현실의 고통에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그때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역시 내 삶인 걸, 이라고 해두는 것이
최선이겠지.
하늘이 차니 달이 뜰에 내렸다.
마음은 차가운데 나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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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寒月委庭 
희망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