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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땡깡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겁먹고 있었다.
하나의 가능성이 놓여 있다고 착각하던 그 순간조차도
차라리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고 조금은 생각했다.

상처는 치유된 것이 아니라 그저 덮어졌을 뿐이다.
아니면 상처를 나의 몸과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동안 내가 유난히 기분이 좋을 수 있었던 건
내 앞에 그 어떤 길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택하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이 그저 뻥- 뚫려 있었더라면 나는 아무 생각없이 갔을 지도 모른다.
아니, 제발 그러고 싶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 길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 앞에 놓인 작은 틈이 길이라고 쉽게 믿었던 것도 같다.
작은 의심이 한 번 놓이면 그것은 끊임없이 자라난다.
특히 나같이 의심이 많고 겁이 많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렇다.
그래서 작은 의심 하나하나를 공들여 치우고 그 작은 틈을
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이 덤불로 덮여 있을 때, 그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리라 확신하지 못할 때
(물론 길은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는 건 길이 어딘가에서 막혀 있다는 의미다)
나는 아주 쉽게 포기한다.

물론 나는 어느 정도는 덤불을 헤치며 가곤 하지만
내가 왜 굳이 덤불을 헤치며 가야하는가 하는 의심과 불안은
나를 주저하게 한다. 그리고 대게는 포기하게 한다.

혹은 덤불 따위는 얼마든지 헤쳐나가 주겠어,
자갈이 많아서 걷기 힘든 것 따윈 괜찮아,
앞에 산이 놓여 있으면 까지것 한 번 넘어가주겠어 하고
마음 먹을 수 있지만 벌레가 너무 많다거나 중간에
강이 놓여 있다거나 하면 나는 타협 대신 포기를 택한다.
그런 일들까지 견디며 꼭 이 길로 가야할 이유가 있냐고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사실은 이미 마음 속에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그러니까 길이 뻥 뚫려 있었더라면 나는 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그리 보였던 길은 사실 그렇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모 대부업체 광고처럼 '쉽고 빠르게' 포기하는 것이 나의 미덕.

이미 충분히 겁먹고 있던 내가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먹는 데는
이제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다.
담배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의 일들에 기꺼이 부딪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취직 준비는 대체 언제 시작할래-)

또 땡깡을 부리고 있는 것 같네.
부관실에서 근무하게 된 이후로는 평일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조금 마셔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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