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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노력해서 얻은 여유가 아니었으니 뭐라 말할 자격은 없다.
단지 그 갑자기 저절로 생긴 여유를 믿고 잔뜩 호기를 부린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오늘 오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모습으로 가는 것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문에 여유를
잃은 것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이미 위태위태 했고 오늘은 만화책을
보다가, 소설을 읽다가 몇 번이나 견뎌내지 못할 뻔 했다.
예전에는 내게 가장 익숙한 감정이었던 슬픔이 이렇게도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어째서 여태 살아오며 정해놓았던 나만의 규칙들을 모두 번복하며
이렇게 바둥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래 '왜'보다는 '어째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멀뚱멀뚱 쳐다보며 순진하게 던질만한 질문은
아닌 것이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진지한 대답을 요구하며
'어째서'라고 물어야만 한다.
모두들 고맙게도 나의 바보짓에 회의적이지만 나는 웃으며
그만두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어찌됐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며칠 전까지 갖고 있었던, 대체 어디서 솟아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 여유 때문이기도 하다. 여태 발버둥쳐도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지금이라고 얻을 수 있을리 있겠는가.
얻고자 함이 아니라 어렸을 적 고모 방에서 훔쳐왔던
삼류 시인의 시집 제목이 말하듯 그보다 더 슬픈 말은 없다는
그 단어, 그 단어를 조금 더 유예시키고 싶을 뿐이다.
내가 번복하지 않을까 꽤나 의심스러워 다시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그 단어를.
사실은 나 자신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거부하던 강박 증세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나의 2년간의 짝사랑이 사실은
그저 강박증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처럼,
아니 사실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내가 내 감정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처럼 지금의 나도
내게 어떤 감정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질문이 이어진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나의 과거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던 것일까.
더이상 비겁하게 숨어들지 않겠다고 애써 접어놓았던 나의 과거들은
이제 정말로 더이상은 펼쳐지지 않는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달란
부탁에도 굳이 걸려온 전화,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본지 꽤 오래된 것
같은 그 애교섞인 말투에도 끝내 내가 너에게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는,
정말로 궁금증 밖에 남지 않은 질문만을 남겨둔 나는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렇게 과거를 접어냈는가. 물론 그렇게 정성껏 하나하나의
기억들을 접어놓고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 약해져 과거로 숨어들지
않는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때에는 내 앞에 그 무엇도
더이상 펼쳐지지 않을 것이란 예감은 조금도 없었다.
차라리 다시 숨어버리고 싶은데 이미 생각나지 않는 기억들,
이미 버려진 예전의 감정들은 유일하게 온전한 내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놓았다. 내가 무엇도 잡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것들을 놓으면 내가 바라는 것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무엇도 없다.
적당히 밀쳐두어도 좋았을 것을...하고 후회해보지만
역시 그렇다고 다시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잡지 않는 쪽이 옳고, 다시 잡는 것처럼 바보같은 짓도 없다.
나는 그냥 지독하게 운이 없을 뿐이다. 그래, 그뿐이다.
잡을 수 없는 것은 놓아야 한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이 말에 어폐가 있다면 적어도 행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바보같다는 말 정도에는 모두 동의하리라. 그렇기에 잡을 수 없는
것은 놓는다. 언제나 판단이 빨라야 한다. 멍청한 것은 죄악이고,
행복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지만 역시 나처럼 운이 없는 경우는 조금 다르다.
잡고 있든 놓고 있든 어차피 결과는 같았던 것이다.
그런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경우까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라하는
것은 역시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연민일까 또?
나는 이제 대답하고 싶지 않고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역시 너무한 일이더라도 그것은 어차피 나의 문제라는 것,
그 누구도 공감하거나 해결해줄 수는 없는 문제라는 점이 뼈저릴 뿐.
조금 센치해진 것은 인정해야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그 회의적인 모습을 빠르게 되찾아가고 있다.
나답지 않은 노력이나 인내 따위는 상관없지만
(왜냐하면 나 자신의 강박증을 깨달은 후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생각해야할 시간이 길어져 내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고 나면
화가 나게 되고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문장은 '대체 왜'다.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훨씬 현명해지고 옳은 길만을 간다고 해도
결국은 내가 대하는 사람 또한 현명하지 않으면 나의 그 노력들은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현명해질리도 없고
내가 그런 사람과 마주대하게 될리도 없는데 나는 왜 현명해져야 하는가.
그런 논리들이 순식간에 그 순환을 마치고 나면 나는 그 무엇도
믿지 않고 다시 또 무기력증과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 언제나 그런 순서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언제나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
현실의 기반은 부실하다. 그렇기에 내가 더욱더 무언가 붙잡으려
발버둥치는 것이겠지만 그 대신 붙잡는 것이 과거냐 미래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는 언제나 과거쪽이었다. 그토록 신나게
당했던 마지막 연애를 떠올려도 나빴던 기억들이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결국 나빴던 일들은 하나의 앙금과 이미지로
풍화되어 기억에 간신히 메달릴 뿐이고 그 나머지의 좋았었던 일만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그 자리에 버티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기대는 것은 쉽고 나 또한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특히나 모든 일을 사유 속에서 처리해버리는 나같은 인간으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과거를 박차고 나섰지만
여전히 흐릿한 이미지에 불과한 미래는 내것이 아니었고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나는 이유를 정말로 알지 못한다. 물론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아예 감조차 잡지 못한다는 것일 수도 있고, 몇 가지 보기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는 경우일 뿐
적어도 나의 의식은 그 이유를 알아낼 것을 스스로에게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물론 나름의 추측은 하고 있다. 그리고 꽤나 유력한 가설이다.
돌이킬 수 없는 불신감,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침식하고 있었던
그 불신감이 나를 완전히 뒤덮어 영원히 마음을 닫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끝없이 눈물을 삼키며 버텨왔는데도 결국은 그런 것이라는,
여태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를 스스로 비웃을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맞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나는 또 약해지고 무덤덤해지기를 반복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약해지지 않는 때도 있다는 점에서 발전인 것도 같다)
내가 원하던 순간은 이미 지나가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터무니 없이 늦었음에도 나는 놓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 그저 추측할 뿐 분명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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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오랜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