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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언제나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연구소로 들어왔다. 뜨겁고 무겁고 눅눅한 공기. 지금의 나는
며칠 전의 다짐대로 영어를 공부하고 있든가 금요일에 시험을 봐야 하는
불어를 공부하고 있든가 아니면 오늘 아침 - 너무도 오랜만에 - 잡은
책을 읽고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또 언제나처럼 모든 할 일은
내일로 미루어 놓는다. 태어나서 이토록 식욕이 없던 적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 적도, 이렇게 화가난 것도 처음이기에
나는 너무도 익숙한 논리에 따라 다시금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딱히 놀고 싶지도 않지만 딱히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지만
그것 외에는 지금의 이 상태 - 분노와 어이없음과 난감함 - 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무거운 공기는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혼자 조용히 숨을 삼키고
침을 삼키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어느샌가 헐떡거리고 있다.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해낼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 바라서는 안 되고
기대할 수도 없는 그 지점에 놓여 있다. 그것이 나라는 까다로운
인간의 문제인지, 아니면 세상의 문제인지 나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제대로 줄을 서서 지하철을 타기를 바라고,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누구나 그리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걸음이 느린 주제에 공연히 좁은 길 한 가운데로 다녀
사람들의 길을 막지 않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바라서는 안 될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 누군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발전적인 방향인지
쉼없이 모색할 것, 자신의 단점 혹은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고쳐 나갈 것 정도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단점을 장점이라고 우기고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는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자신의 사소한 단점을 스스로 부각시켜
더욱 심각한 단점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애초에 인식하지도 못한다.
단점 그 자체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단점보다 더욱 문제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걸음이 느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보행에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것이고
너무 살이 찐 사람은 옆에 앉은 사람이 불편하지 않을까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것이고, 향수를 뿌릴 때는 향이 너무 심하게 나지는 않는지,
외출을 할 때는 적어도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옷차림은 아닌 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점에도 두 가지 단점이 있다.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나는 단점으로서
남에게 피해는 되지 않지만 자신으로서는 부끄러운 단점이 그 첫번째고
두번째는 후천적으로 교정이 가능하며 타인에게 폐가 되는 그런 단점이다.
첫번째 단점에 있어 우리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외적으로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은 경우는 적절히 보정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보정이 은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깨가 너무 좁다면
어깨가 좁아보이지 않는 옷을 입는 것으로 족하다. 억지로 보형물을
넣는다거나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두번째 단점은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고
인식한다고 해도 제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단점들은 대부분 환경에 의해 결정되거나 아무 생각없이
몸에 익은 그런 것들이다. 혹은 정신에 깊이 뿌리박힌 악습이기에
적절한 대처를 하기 어렵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린다든가
자기 차례를 지킨다든가 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규칙들조차 어겨지는 것을 매일 같이 보게 된다.
그보다 더욱 뿌리깊게 박혀있는 문제는 소위 개성이나 자유 혹은
취향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것들이다.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머플러를 개조하여 굉음을 낸다든가 지나치게 요란한 의상이나
헤어스타일로 거리를 다닌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러하다.
그밖에도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한다든가, 심한 노출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인데도 그저 그렇게 넘어가진다.
이렇게 쓴소리만 잔뜩 쏟아내는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 나 자신의 단점과 잘못들에 대해 열 중 아홉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혹은 그래서) 알면서도 고치기
어려운 것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점에 대해서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꾸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부끄러워할 새도 없을 정도로 엉망인 세상에 분노만을
표출하면서 결국 알면서도 그 무엇도 고치지 못하는 내가 싫어진다.
지난 일년 동안 내가 나아진 점이라고는 샤워하고 꼭 새 타월을
걸어놓는 것, 양치질을 하고 칫솔들을 꼭 꽂아놓는 것, 술 먹고
아무데나 전화하지 않는 것, 남보기 부끄럽지 않게 몸무게를
관리하는 것, 단지 편하기만 한 옷 대신 나름 깔끔하게 입으려하는 것
등이다. 여러모로 잔소리를 해준 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느리지만 어쨌거나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데에 조금은
자랑스럽기도 하고, 원래 남들보다 단점이 많은 주제에 - 그리고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대부분 알고 있는 주제에 - 고쳐나가는
속도가 너무 더디고, 알면서도 결국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 지라
부끄럽기도 하다.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당당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로서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옳은 방향으로 고쳐 나가고
(그것을 인식하고도 잘못된 방향으로 고쳐 나가기 시작하면 사실 방법이 없다.)
자신을 좀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 나가는 것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고
공연히 거부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루를 시작하며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 지 바라보고,
하루가 끝났을 때 자신의 하루에 부끄러운 일은 없었는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바꿔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무신론 이외에 내가 확신하는 유일한 명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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