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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망설이던 당신은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간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아내의 반응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어쨌든 겪어야만 하는 일이니까.
며칠쯤 출근하는 척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다른 이유 때문에 회사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진실을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신 외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당연하지 않았던 그 거짓된 질서는 이제 무너졌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때란 걸 당신 또한 안다.
물론 그 현실이란 여태 당신이 가졌던 모든 것의 끝이다.
당신은 그것이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체념한 채 그 모든 일이 시작되도록 자신을 속이던 그때처럼 당신은 여전히 자신을 속인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어쩌면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던 그때 ,
멈춰야 한다고 숨겨야 한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당신이니까. 당신은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행복같은 건 없다고. 당신이 발버둥쳐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고.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당신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원칙주의자에 단호함 사람. 옳지 않은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사람.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그러나 그런 작은 여지조차 없는 태도는 마음을 갉아낸다.
속으로 삵는다. 한순간 무너진다.
어떻게 아냐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니까. 당신은 결코 알 수 없었겠지만.
그러나 당신은 운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들을 당신은 갖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하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당신에게 있어 그저 당신이 이미 소비해버린 가능성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나보다 버텨야 할 이유가 적었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에게 미안해 한다는 말은 아니다.
실상 나는 그냥 우연히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이 당신의 삶을 조금 더 절망스럽게 느끼도록 만드는
존재였을 뿐이었을테니까. 나의 존재가 한 일이라고는 그 순간을 조금 더 앞당기는 것 뿐이었고,
당신은 삶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정도 의미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아무도 당신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안다고 생각하기에 묻지 않는다. 당신은 세상에 흔하디 흔한 실수,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에게는 그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다. 당신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무너진 건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니까.
그렇지만 무너진 것이 당신이 아니라 그들 중 하나였어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술이 한 잔 들어간다. 그리고 한 잔, 또 한 잔. 술이 약한 당신은 취기를 느낀다. 뻣뻣한 당신 팔틈으로
그녀의 팔이 들어온다. 뭉클한 느낌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다. 술기운이 더 올라오는 것도 같고
술이 갑자기 깨는 것도 같다. 바짝 낀 팔짱 탓에 그녀의 가슴이 느껴진다.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다. 설렘도 오랜만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도 아니라고
믿고 싶지 않다. 당신은 못이긴척 끌려간다. 당신과 나같은 사람들은 그렇다. 잘못된 일은 결코 저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유혹에는 약하다, 어처구니가 없을만큼. 당신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모텔 입구에서 순간 망설이는 당신의 팔을 잡아 끈다. 한걸음 끌려가는 순간
모르겠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술을 샀으니 여기는 자신이 내겠다고 한다.
익숙하다는 듯 만원짜리 두 장을 지갑에서 꺼내어 건네는 모습조차 조바심 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마자 그녀는 당신에게 안긴다. 당신도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는다.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고 당신의 눈을 바라본다. 당신이 누군가의 입술을 보며 설렜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이라고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울었을 수도 있다. 무너져가는 당신의 삶에 그런 기적같은 순간이 다시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간다. 서둘러 서로의 옷을 벗긴다. 서둘러 침대 위로 쓰러져
서둘러 서둘러 서둘러.
사정을 하고 몇 초쯤 지난 후 식어가는 땀 아래로 불안감이 스며든다. 당신과 그녀는 담배를 한 대씩
태운다. 당신은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 담배를 태우지만 그녀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불안감 또한 옅어져 간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쉬어졌겠지.
그리고 당신은 깨달았을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 버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모든 것을 놓아도 될 것 같아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그러나 슬프게도 절망의 마지막은 추락이 아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주 서서히 잠겨갈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드러난 순간 모두들 당신을
비난한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숨이 막혀온 채 가라앉을 수밖에 없던 당신을,
이미 발버둥치는 것조차 포기한 채 절망의 한가운 데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던 당신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마저도 기대하지 않았던 당신은 조용히 모든 것을 놓는다.
오래도록 망설이던 당신은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아는 죄라곤 절망 속에서 부질없는 발버둥을 포기한 죄 뿐.
마지막의 달콤한 독은 오히려 너무 늦게 오지 않았던가.
나는 당신을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당신의 노곤한 절망에 대한 변호를 하기 위해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래지 않은 언젠가 나 또한 당신만큼 허우적 댈 것 같아서, 당신만큼 서서히 가라앉을 것 같아서,
당신만큼이나 달콤한 기만을 기대할 것 같아서, 우스울 정도로 작은 유혹에 무너질 것 같아서
나를 위한 변명을 미리 세우는 것 아닐까.
당신이 이 글을 읽는다면 조금은 위로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또 일어날 것이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이렇게 끝내야겠다 당신이 결코 읽게 될리 없는 이 편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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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fictionarious 
읽히지 않을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