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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곳에 가게 된 이유는
그저 사는 것이 너무 지겨운 탓이었을까.
매번 피하기만한 것들에 후회하곤 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치과의사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에
언제나 그랬듯 가능성 없는 우연에 나도 모르게 기댄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항상 모든 상황을 가정하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건네면 상대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이라
미리 예상하고는 했었다. 물론 그런 기대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상황은 언제나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식으로 흘러가곤 했다.
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한다.
잦은 실수 덕에 예상 범위 내의 일들에는 꽤나 담담하지만
조금만 예상 범위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조차 익숙해진,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이제 안다.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순간들보다도
예상에서 아주 벗어난 상황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을 때
바로 그때 모든 것이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그때란 것,
하지만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어긋난 채 일어나 버리는 바로 그때란 것을.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유일하게 비어있던 그 자리,
스무 명 중 단 한 명 뿐이었던 치과의사란 그 자리 주인의 직업,
마치 그렇게 정해놓기라도 한 듯 내 차례가 되자마자
도착한 자리의 주인,
똑같은 웃음, 똑같은 발랄함, 똑같은 예의바름 그리고 똑같은 작은 키
그 모든 것을 정말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지웠던 그 웃음, 내가 깨트린 그 발랄함,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작은 키에 대해 잊지 말라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라고 누군가 그렇게 꾸며놓았다고
믿고 싶었을 정도였다.
똑같이 여행을 좋아하는지, 똑같이 책을 좋아하는지,
똑같이 그렇게 혼자 웅크려 상처를 숨기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두 시간 내내 나는 그 질문을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마지막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모든 죄의식을 계속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듯
자리의 주인은 나에 대해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그것도 아무리 봐도 좋아보이지 않는 남자와 나란히 사라졌다.
그렇게 보내도 좋았던 것일까,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닮은 사람을 그렇게 쉽게 보내도 좋았던 걸까.
연락처라도 물어봤어야 했던 건 아닐까.
나는 무엇을 잃었던 걸까.
앞으로 내가 다시 가질 수 있는 건 뭐지.
숱한 후회, 숱한 고통, 숱한 갈망이 다시금 반복됐다.
함께 있던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터벅터벅 집에 오는 길에서야
깨달았다.
내게 정말 돌이킬 마음이 있었다면,
내가 정말
그 모든 잘못에 대해 돌이키고 싶었다면
나는 그 자리의 주인이
여행이나 책을 좋아하는지 따위를 궁금해 해서는 안 되었다.
내게 정녕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자리의 주인이
대학병원의 치과에 있다고 했을 때 혹시 같은 병원에
내가 웃음을 앗아간 그 사람이 있는지 물었어야만 했다.
그 자리의 주인에게라도 무언가 돌려주고 싶다는 유치한
욕망보다는 그 자리의 주인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누군가를
그리워했어야 했다.
아니, 그보다는 죄의식에 다시금 시달리는 편이 더 진실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남자와 나란히 걸어 나가는
그 자리의 주인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똑같은 눈웃음과
똑같은 발랄함과 똑같이 작은 키를 보았고
내 기억에는 없는 서른이 갓 넘은 여자의 피부와
익숙하지 않은 다소 짙은 화장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도 너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저 내 죄의식을 다시 돌아보고 있었을 뿐.
너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나 때문에 다시 고통스러웠을 뿐.
지금 나는 서재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나를 둘러 싼 수많은 책들을 돌아보며 과연 이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내 기억에 남아있나 생각한다.
내 삶 속의 수많은 사람들 중, 길고 긴 시간 중 아주 극히
일부만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대부분은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물론 정말 중요한 책들은 대부분 내 방에 옮겨 놓은 탓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도 의미없는 것들 속에 놓여있는 기분이다.
그 순간 너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의 주인조차
잡지 않은 것은 내가 다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간 몇 번이나 머리 속으로 생각했지만
언제나 같은 결말이었던 그 장면들과 똑같이 끝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눈웃음의 잔상이 여전히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가장 슬픈 것은 내가 어제 본 그 웃음,
널 처음 보았던 날 나를 설레게 했던 그 웃음보다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사진 속의 그 웃음이 기억 속에
더 강하게 남아있다는 사실.
일년 반의 시차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역시
금방이라도 울듯한 그 미소의 잔영이 여전히 내게 미안함을
강요하기 때문은 아닐까.
지난 주 너무 정신없이 일을 한 탓인지
오랜만에 몸이 아팠던 탓인지
그래서 덕분에 그럭저럭 유지하던 근육이 모두 사라져서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
간만에 또 어린애처럼 그저 더 망가지고 싶은 기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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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arious 
읽히지 않을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