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이 나이쯤 되면 받아들이게 되는 이런 저런 행복을
이제는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과 정반대로 돌아온 길이지만 어쨌든 나도 결국 남들과
비슷한 언저리에 도착해 그렇게 살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김연수가 심연의 거리를 건널 수 있을 가능성을 소설가는
글에서 찾는다고 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 언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말해주는 지표 그 자체이다.
나는 언어를 통해, 내가 쓰는 글을 통해 타인과의 사이에 놓여있는
그 심연을 지우려고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언어를 느끼고 받아들이며
혹은 거부하며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를 규정한다.
그러니까 너는 조심스러움을 배워야만 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그토록 민감했던 시절은 이미 지나보냈을 지라도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 언어가 여전히 갖고 있는 그 무게에 대해
생각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건 네가 결코 알 수 없는 거리고, 네가 결코 알 수
없는 외로움이며, 네가 살아온 세계에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니까.
그리고 난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에 그것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우리가 함께 다른 방법을 찾았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 단어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 반복하며 오가던 언어의 섬세함 만큼이나 날 설레게 하는 것이
있음을 나는 이미 경험한 적 있으니까.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신 더
세상의 다른 면 또한 사랑하고 갈구하니까.
내 세계의 가장 음울하고 섬세한 부분, 그러니까 그 누구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것이기에 내가 나 가장 나 자신다운 것이라 규정하는 그 부분의 반대편 끝에는
네가 익히 잘 알고 있을 욕망이,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이
있음을 너는 결코 알지 못했다. 설사 누군가 나의 어느 한 부분을 이해한다고 해도
한 인간 안에 그 두 가지가 그토록 강렬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삶이 어렵다고 생각했던 건 그 두 끝에 번갈아
닿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한 쪽에도 닿지 못하고 끝없이 싸워야만 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예전보다 멍청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남들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리고 내가 예전보다 살아가는 법을 잘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남들보다 어리숙하다.
나는 계속 쓸쓸한 눈으로 내 안의 균열을 적어내려가며 살아있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속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다 - 편안한 삶, 넓은 집, 예쁜 여자.
행복한 보들레르. 혹은 속물적인 보들레르.
불가능을 꿈꾸는 것보다 모순되는 것을 꿈꾸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은 그 불가능함을 깨닫는 순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모순된 꿈을 - 그것도 불가능한 두 가지 꿈 사이의 모순 - 꾸는 사람은
그 사이에서 끝없는 고뇌와 투쟁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대체 어느 쪽의 열망을 꺼뜨려야 하는 것인지 그는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의 열망이 더 많이 충족되면 충족될 수록 반대쪽에 대한 열망이
더 커져만 가서 그를 삼키게 된다. 그러니 그에게 행복해지는 길이란 양 끝에 놓인
그 욕망들을 동시에 서서히 꺼뜨리는 수박에 없다. 그러나 수축하는 욕망과 동시에
그의 세계, 혹은 그의 자아 또한 빠르게 수축하게 되며 때로는 오래된 투쟁 속에서
느껴지던 불안과 떨림이 사라졌음에 불안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불안함마저 사라지게 되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방도조차 없게 된다.
그는 멍한 채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지만 여전히 아무 것도 충족되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예전처럼 자신 안의 모순된 세계를 말하는 대신
자신 안에서 사라진 부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작아진 세계 속에서도 역시
자신은 행복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를 제외한 모두에게 익숙한 그 세계의 크기를
새로 느끼고,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모두가 그 세계에 익숙해지고 편안함을 느끼는 동안 자신은 그 너머의 세계를
도려내기 위해 살아야 했었음을 - 그 시간의 대부분은 도려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보내졌다 - 그래서 어떻게 해도 다시는 여전히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미숙아일 뿐이며 언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단숨에 건너뛰게 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그 자체를 의미함을 깨닫는다.
오래 전 도려낸 부분과 함께 떨어져나갔다고 믿은 어떤 감정들이
어제 오후 내 안에서 다시 서서히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에는 아무 것도 걸지 않아.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이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 안의 다른 것들만큼이나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희망 대신 의지를 믿는다. 그리고 욕망 대신 의무를 따른다.
모든 것을 알고 싶다. 모든 것에 닿고 싶다.
나는 그냥 모든 것이고 싶다. |
|
0
278 
2/20 
fictionarious 
읽히지 않을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