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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무슨 대회에 나가느라 일본에 다녀오자마자
중간고사를 봐야만 하는 때였다.
당연히 일본에 다녀온 그 일주일 동안 수업은 듣지 못했다.
국어 시험 문제 중 '비단'으로 작문하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다녀와서 그나마 공부한 기억으로 '비단 그것 뿐이 아니었다'라고
답을 작성했다(내 기억력은 스스로도 저주하는 바이지만 그 답만은
명확히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문제의 요지는 '비단'이라는 표현이 '뿐이 아니다'라는
부정형의 종결과 호응한다는 것을 아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담임은 그 답이 틀렸다고 깔끔하게 채점했다.
항의했던 것도 기억나는데 당시 담임의 표현에 따르면
앞에 주어가 없기 때문에 틀린 것이라 했다.
물론 엄밀한 의미로는 주어가 없기에 비문이었지만
나는 그때 담임이 왜 그 문제를 틀리게 채점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순진하게도 일기에 대회 참가로 경비가 지급되며 그 경비에
담임 선물 살 돈도 포함되어 있다고 적었다(물론 착각이었다.
그 따위로 경비를 지급하는 대회가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담임은 돌아와서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주지 않은 내게
적절한 벌을 준 것이다.
당시 그 담임이란 사람은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 전까지(10월이었으니까 이미 한 학년을 거의 다 보냈을 때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이미 스트레스를 받았던 터였고
(우리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드물게도 담임을 찾지 않는
그런 학부모셨다)
탐욕스런 자의 기대를 순진한 마음에 잔뜩 부풀려놨던 벌은
그렇게 돌아왔다.
초등학교 때 성적이야 내 인생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 탐욕스런 자가 초등학생 제자에게 가한 치졸한 복수는 그 사람에게
그 어떠한 벌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대회에서 엄청나게 삽질을 하고 공짜 일본 여행에 만족해야 했던)
그 불운했던 제자는 15년이 지나고도 그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오늘 민아 누나랑 이야기 하다가 내가 왜 대원외고에 가면서
불어과를 택했는지 오랜만에 다시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이유를 듣고 누나가 '어처구니 없다'고 했다.
나 역시 지금에 와서는 정말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그런 선택을 한 것이 나란 것은 변함 없으며,
내가 그 작은 선택이 가져온 이 엄청난 결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불문과에 가고, 대학원에 가고, 결과적으로 아직 군대에 있는)
나는 그때 그런 선택을 한 나의 나약하지만 세심했던 마음을 사랑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그때의 선택과정을 여기에
구구절절 다시 적고 싶지는 않다. 궁금하면 술을 사시든가)
타인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아주 작은 선택들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 2002년 내가 택한 사소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또 다른 선택들과 2006년 말과 2007년 초에 있었던
그 우스운 선택들을 생각할 때 나는 새삼 또 두렵다.
우리 삶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사소한 선택들의 결과물인지를
생각하면 숨이 턱하니 막힌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그런 선택을 한 나 자신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결과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내 삶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었든 간에 그 순간의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믿는다.
내가 선택한 일들의 결과가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사게 되거나
나 스스로 비난할 만한 것이라 해도 어쨌거나 내가 그 선택들을
한 이면에는 순진함이나 섬세함, 진실함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 선택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
그 모든 결과로부터 조금씩이라도 배워나가고 여전히 자라고 있는 나를
사랑스럽게 여긴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마찬가지라 여전히 바보같은 선택들을 하고,
그 바보같은 선택에 기인한 끔찍한 결과만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예전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더 현명하고,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로부터 배워나가 조금이라도 나은 선택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삶은 여전히 살아갈 만하다.
내 삶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래 전 그 담임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부적절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한 어처구니 없는 선택이 지금 내 삶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고통스런 부분들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 자신이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은 것은
내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일지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조금은 부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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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zzl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