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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situations

윷놀이를 하다가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우리 팀은 시작부터 빽도를 네 번 연속한데다가 다섯 번째에
'모'가 나왔음에도 특이한 룰 덕에 바로 말이 죽어
다섯 번째 턴까지 말이 나가지도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두 판을 했는데 두 판 중 최고로 많이 나가본 것이 '걸'이었고
'걸'에 나간 말도 나가자 마자 잡혔다.

하지만 더욱 엄청난 일은 영섭샘이 윷을 던졌을 때 '모'가 나온 덕에
지용샘과 나와 보드게임방 직원이 다시 던지라고 했던 때 일어났다.
나는 영섭샘이 화를 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평소 혼자 다닐 수 있는 영섭샘이 테이블에서 10cm 위로 팔을
못 들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난 이 이상 팔을 못 들어요'라고 말해주셨더라면 좋았을테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구보다도 자신이 괴로웠으리라.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말을 할 사람도 없을 터였다.
대체 누구의 잘못인 걸까.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잘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잘못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상황은 대체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그때 영섭샘은 가장 친한(혹은 만만한) 지용샘에게 화를 냈지만
사실 내가 덜 친했기 때문이었을 뿐 같은 잘못을 영섭샘에게
저질렀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 번째 상황.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상민이 형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휠체어에서 일으켜 화장실에 데리고 갔는데 밥이 나오고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휴지를 갖다 달라고 해서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상민이 형이 나오겠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형을 일으켜서 데리고 나오는데 형이 전보다 다리 힘이
세진 거 같아서 마음을 놓은 것이 실수였다.
내가 형을 놓쳤고 형이 화장실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정말이지 내가 잡을 겨를도 없이.
더 놀란 건 형이 아프다는 말도 없이 괜찮다고 하고 그냥 바로
밥을 먹으러 갔던 것인데 아직도 그 순간이 마음에 남는다.

사는 건 너무나 어렵고, 나보다 훨씬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내가 그들과 함께 하려할수록 어려움을 느낀다.
어떤 선배가 나중에 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 하고프다는 여자친구를
이해하지 못한 것만치 나의 장기기증서약에 동감하지 않는
가족들과 당시 나의 가족들에 더 공감했던 여자친구였던 사람이
이해가지 않는다(참 우스운 것이 장기기증서약은 본인의 서약이
있더라도 사후에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이뤄지지 않는다.
썩을, 나는 내 시체에 대한 권리도 없다).

지난 주에 차지연과 술을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좋은 점을 더 말하고 다닐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르고 우습게만 본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심지어 내가 사귀었던 사람들마저 나의 좋은 점이라고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그것이 내가 언제나
외로웠던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하다못해 소개팅에 나가서도 나는 차이코프스키가 너무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소녀시대가 좋다고 말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니까.

누군가 나의 좋은 점을 온전히 이해하고
누군가 나의 모자른 점을 제대로 비판해주었으면 하지만
그것 또한 큰 욕심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토록 어려운 세상에,
내가 배우고 고치고 해야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 이 세상에
정녕 진리와 정의와 믿음에 대한 환상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어느 소설 제목처럼 '진리는 시간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진리에 가까워지고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는 확신 하나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만큼 증오하지 않을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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