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78 　9/20

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아가에게

내가 했던 가장 비겁한 짓은 술을 잔뜩 마신 날 새벽
사당 역에서 첫차를 기다리며 어머니 품에 안긴, 이 세상을
일 년도 채 살아가지 않았을 아기한테 마음 속으로 말을 걸었던 일이다.
아가와 눈을 맞추며 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저 그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어쩌면 나보다 훨씬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내가 그 아기에게 건넸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너는 이 세상에 왜 나왔느냐고, 이렇게 술을 잔뜩 마시고
울먹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세상에 왜 나왔느냐고.
네 지금 표정도 나의 표정처럼 무기력한 그런 것으로 변해갈거라고.
너도 나처럼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열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너만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삶의 목표라고, 네가 자랐을 때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 같은 것은 아무도 기억 못할만큼 살아갈 만한 곳이기를
바란다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이제 너는 너의 발로 걸어다니고 가끔은 웃고 가끔을 울고
내가 내뱉었던 그 비열한 말들보다 훨씬 진실되고 솔직한
말들을 하고 있을테지. 너 역시 언젠가 나처럼 비겁해지고
무너지고 도망쳐버릴 지도 모르지만 나처럼 약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처럼 그렇게 항상 운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믿는단다.
그리고 바란단다. 나는 무릎을 꿇고 빌었단다. 결코 내 말처럼
되지 않기를. 그거 아니? 나는 신을 믿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는 건 그만큼 간절히 바란다는 이야기란다.
다행히 나는 나를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한 적은 없단다.
너도 결코 그렇게까지 약해지지 않기를.
그렇지만 나는 또 바란단다. 네게는 그만큼 간절하고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기를. 그리고 쉽기를. 삶도 사랑도 절망도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쉽기를. 얻을 수 없는 것들은 쉽게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은
큰 고통 없이 얻기를. 나처럼 나는 너무 운이 없는 인간이라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이것이 내 삶의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일 따위
결코 없이 차라리 모든 것이 간절하고 또 쉽기를.

그리고 너에게 기다림이 없기를 또 바란단다.
때로는 너무 늦지 않았나, 때로는 너무 이르지 않았나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네게는 너무도 가혹할 기다림 끝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여 주저앉는 일은 결코 없기를.

불확실한 일들도 없기를 바란단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로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때에도
얻는 것은 있단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는 않기를.
불확실한 일을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술을 마시고 지쳐 앉았다
또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네 길지 않은 시간들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언제나 사랑할 수 있기를.
나처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제 영원히 그쳐도 괜찮다고
자신을 토닥이며 끝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기를.
(슬프지만 나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단다.)
세상은 내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절망적이지 만은 않단다.
내가 지금 느끼는 마지막 절망이 너를 떠올리게 해
몇 년 전 비겁했던 내가 너에게 이렇게 미안하다 말할 수 있잖니.

날이 춥고 마음이 스산하다.
너 또한 쉽지 않을텐데하고 또 다시 걱정이 앞선다.


166	il pleure dans mon coeur	Giverny	2007/03/04	405

165	fictionary #5 [2]	Giverny	2010/04/04	404

164	두렵고 또 아름답다	Giverny	2007/07/27	404

163	귀국 단신	Giverny	2007/02/17	403

162	오! 사랑	Giverny	2010/02/22	402

161	내게,	Giverny	2010/01/02	401

160	더럽혀진 슬픔	Giverny	2008/10/19	401

159	옷장 정리 [1]	Giverny	2009/04/13	400

158	말할 수 없음	Giverny	2007/06/07	399

157	애정사용법	Giverny	2008/10/27	398

156	on my pace	Giverny	2008/05/25	398

155	기적	Giverny	2009/04/16	397

154	별	Giverny	2007/06/02	396

	아가에게	Giverny	2007/03/01	396

[1][2][3][4][5][6][7][8] 9 [10]..[2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