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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on my pace

모든 것이 평온하다.
아니, 평온하다기보다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용인할 수 있을 만큼의 게으름과 무관심 속에서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지만 나는 예전보다도 더 느끼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머리로 아름다움을 알면서도 그 어떠한
감응도 느끼지 못하는 관람자로서 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 모두를 바라보지 못하고
누군가를 안고 있으면 다른 이에게 건넬 손이 없고
누군가에게 입맞춤한다면 세상 그 무엇도 보지 못할 것.
물론 아무런 사랑도 없이 아무런 느낌도 없이 존재하고
그런 내 존재의 그림자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이상적인 나를 실현시키고 싶지 않다.
언제나 타인에게 충실하고 세상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매순간을 바둥거리는 그런 대단한 나는 기대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여전히 설레고 실수하고 게으른 나를 원한다.
차라리 사랑에 눈이 멀고 내밀 손이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의 자그마한 행복과 곳곳에 숨겨진 작은 기적들(다시 말하자면 착각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쪽이 내가 원하는 바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과 다름에도 내가 지금의 평온에
만족하는 까닭은 돌아볼 여유가 있기 때문, 내가 무엇도 원하지 않을 때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가 아닌 무엇이 나를 원함을 - 나를 필요로 함을
알기 때문.
내가 세상에 무언가 의미있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에서 진정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아야 함을 나는 잘 안다.

그리하여 나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오늘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아.
내일도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리란 기대는 갖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조급해질 날이 올 것이고, 운이 좋다면
조급해지기 전에 지치기 전에 내가 원하지 않는다 믿고 있음에도
사실은 진정 원하고 있던 무언가를 손에 넣으리라.
그리고 끝끝내 무엇도 내 손 안에 놓이지 않더라도 구질구질한
희망은 그 얼만큼의 크기로든 간에 남아있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적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내가 무언가 원하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무언가 원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엇도 원치 않기를 바라기 때문인가 보다.

조금도 설레지 않아.
이제는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의식인지
무엇이 욕망이고 무엇이 현실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언제나 모든 것이 또렷이 보이는 건 내가 손내미는 때가 아니라
누군가 내게 손내미는 그때. 바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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