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책을 머리와 마음으로 동시에 받아들이며 읽을 수가 없다.
오히려 억지로 나의 시선에 스쳐지나보내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들은 있다.
오늘 단숨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또한 그런 작품이었다.
한 여자가 약혼자에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다.
약혼자는 그녀를 찾기 위해 먼 친척의 남편에게 부탁하는데
그는 휴직 중인 형사다. 그는 내키지 않아하며 부탁을 들어주지만
이내 이것이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후의 스토리는 너무나 복잡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의 미덕은 그런 현란한 줄거리나 전개 방식에 있지 않다.
그녀의 최고 미덕은 한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시키는 데 있고
그 사회적 문제가 우리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웅변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치밀한 심리묘사,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화자에 가까운, 하드보일드한 주인공에 가까운 혼마 슌스케는
사실 하드보일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휴직한 형사로서
비공식 사건을 맡은 입장이지만 더이상 그 일이 돈이 되지 않을
시점에서도 계속 일을 맡는다. 그가 계속 일을 맡는 이유는
신용금융의 함정에 빠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신분을 바꾸며
살아가는 범인에 대한 호기심이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결론 짓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동기는 그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그의 목적은 법의 수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 있다.
'왜 자네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자네는 왜 자신을 버려야만 했나'
라고 묻고 싶어하는 혼마 슌스케, 그리고 약속에 따라 타인에게
질문의 순서를 넘겨버리는 혼마 슌스케는 사실 물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목이 메어서, 어쩌면 두려워서 물을 수 없는 것이다.
혼마 슌스케는 그렇게 보여준다. '나도 자네와 다를 바 없어서
같은 상황에서라면 같은 짓을 저질렀을 지도 몰라.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한 인간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라고 말하고 있는듯 하다.
하드보일드한 인물유형에서 살짝 빗겨간 혼마 슌스케는
필립 말로우 만큼 멋들어진 인물은 아니지만 그보다 조금 더
따스하다.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일본 미스테리 소설의 대모라는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라는
이 작품은 문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대변하는 바가 크다.
먼저 사회적인 면을 살펴 보자.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신용불량자다.
사라진 약혼녀와 그녀를 대신하는 인물은 채무에 시달리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일반적인 사회의 인식 하에서 이들은 우둔하고 비합리적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는 작품에 등장하는
변호사의 말을 빌려 이들을 변호한다.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결코 우둔하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주요인물의 옛동료의 말을 빌려 어떤 환상을
위하여 그렇게 바보같이 빚을 지게 되는 거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한 발언이지 그녀들에게만 가해지는
비판은 아닌 것이다. 신용금융이라는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은
말 그대로 2m도 안 되는 사람의 그림자를 10m로 보이게 만들어 준다.
그 덫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두려운 일면이고
그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작가는 이러한 신용금융의 어두운 단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단면이 개인의 비합리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것인만큼 그것이 어떤
한 개인의 문제로 천착될 수 없음 또한 잘 말해주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놀라운 점은 그것을 단지 웅변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심리묘사로 그것을 우리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키다는 점에 있다.
신용금융과 관련된 부분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신조 교코가 자신의
아버지의 사망 기사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신문을 뒤지고 있을 때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정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거울을 봐, 지금 네 표정은 마치 악마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통의 사람, 아니 보통의 작가라면 잡아내지 못했을 어느 순간,
적지 않았더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내린 순간 이미 독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 미묘한 심리를
미야베 미유키란 작가는 매력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인 면에서는 말을 좀 거칠게 해야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여전히) 우리 나라
여성 작가들에게 글 쓰는 것을 때려치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대체 왜 인간의 이야기를 못 쓰는가, 대체 왜 우리의 이야기를 못 쓰는가,
대체 왜 이렇게 재밌게 못 쓰는가.
강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문체, 프롤레타리아 문학, 여성 문학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우리 나라 문학에서는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남성 작가들도 별로 다를 바 없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비록 이 유명한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작품에 A- 정도 밖에 줄 수 없다.(마지막의 깔끔한 마무리를
생각하면 A0정도 줘도 될 거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돌이켜 생각해볼 때
우리 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고서 이만큼의 무게를 느껴본 적도 없는 점이
참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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