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에게 새로운 외국인 선수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떠나는 외국인 선수는 퇴단과 함께 기억에서 지우게 마련이다. 삼성 외국인 선수 제이콥 크루즈(35)는 5월 20일 구단으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았다. 지난해 한화를 거쳐 올시즌 삼성에서 뛴 크루즈는 개인통산 타율 3할1푼, 24홈런, 108타점을 기록한 채 한국 무대를 떠나게 됐다. <스포츠 춘추>에서 크루즈와 마지막을 함께 하며 떠나는 외국인 선수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5월 22일 대구구장. LG와의 경기를 앞두고 삼성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30도에 육박하는 날씨 때문인지 선수들은 하나같이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복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사내가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삼성 더그아웃을 향해 걸어왔다. 순간 선수들의 시선이 사내에게 집중됐다. 제이콥 크루즈(35)였다.
그가 사복차림으로 구장에 나타난 이유는 자명했다. 선수단과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전날 크루즈는 삼성 측으로부터 퇴출을 통보받았다. 멋쩍은 표정으로 삼성 선동열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 크루즈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유심히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면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 퇴출이 무효가 될 것처럼 그는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5월 22일 대구구장에 나타난 크루즈가 삼성 더그아웃에 들어가고 있다. 엄홍 과장(사진 맨 오른쪽)이 그의 파트너였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배려는 돈이 아니라 세심함
“이거요? 큰 선물은 아닙니다.” 삼성 외국인 선수의 통역 업무를 담당하는 엄홍 과장의 입가에 지문만한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의 손에는 모 백화점 종이백이 들려져 있었다. “아쉽게 퇴단하지만 팀을 위해 열심히 뛴 선수잖아요. 구단의 성의를 담아 산다고 샀는데…” 삼성은 크루즈가 선수단과 작별인사를 나눈 이날. 작은 선물을 전달하기로 했다.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금비녀에요. 크루즈가 아내 지나를 무척 사랑하거든요.” 엄 과장은 그렇게 말한 뒤 “크리스마스 때는 크루즈에게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보내줄 생각”이라고 했다. 언뜻 그가 외국인 선수 통역이라기보다는 크루즈의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엄 과장은 이전에도 그랬다.
올시즌부터 삼성맨이 됐지만 그는 지난해까지 현대 유니콘스(우리 히어로즈 전신) 운영팀에서 근무했다. 2002년 현대 외국인 선수 통역으로 야구계에 발을 들인 뒤 스카우트 업무까지 병행하며 현대를 ‘가장 외국인 선수를 잘 뽑고 관리하는 구단’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엄 과장의 차에 탑승해 크루즈의 집으로 향했다. 지금쯤 크루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있겠지요.” 대개 외국인 선수들은 퇴출 통보를 받으면 다음날 경기부터 출전하지 않는다. 대신 4, 5일 가량 여유를 갖고 짐정리를 하며 선수생활을 연장할 곳을 물색한다.
크루즈의 숙소는 대구구장 근처 아파트였다. 구장과 도보로 5분 거리였다. 1998년 외국인 선수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만 해도 구단들은 ‘돈’이 곧 ‘처우’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숙소에 관해서는 특별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어느 팀 가릴 것 없이 홈구장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주는 것으로 그쳤다. 이동거리에만 집중한 선택이었다. 크루즈의 숙소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물론 집과 구장 사이의 거리가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선수보단 선수가족이 편안히 생활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해요. 크루즈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 대형할인매장이 있어요. 언제든 필요한 물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지요. 동네 주민들의 수준도 꽤 높아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렵지 않아요.” 엄 과장이 외국인 선수들의 숙소를 중요하기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2003년 현대에서 뛰었던 셰인 바워스의 교훈 때문이었다.
“그때는 8개 구단 공히 외국인 선수 숙소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바워스 집이 수원에서 그나마 괜찮은 곳이었는데 주변에 대형할인매장이나 문화시설이 전무했어요. 하루는 바워스 집에 갔더니 그의 아내가 울고 있는 거예요.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었지요.”
바워스가 집을 나서는 오후 1시부터 경기가 끝나 돌아오는 11시까지 그의 아내는 화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말동무는 고사하고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전무했다.
“바워스가 경기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아내가 울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당연히 속상하겠지요. 야구 외적인 일로 신경을 쓰면 마운드에서 집중할 수 없잖아요. 구단에 건의를 했지요. 숙소를 바꾸자고.”
당시 현대는 엄 과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바워스의 숙소를 이태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외국인 거주지역이라 바워스의 아내가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태원과 수원구장이 너무 멀다는 점이었다.
“바워스에게 물었지요. ‘만약 이태원에서 살게 되면 네가 직접 차를 렌트하고 운전도 해야 한다. 가능하겠느냐’ 바워스가 그러더군요. ‘난 그동안 야구를 어렵게 했다.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는 차를 몰고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숙소를 옮긴 바워스는 이전보다 훨씬 좋은 투구를 선보였다. 그해 8월 어깨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현대의 에이스는 정민태가 아닌 바워스였다.
삼성은 외국인 선수들에게 대구구장 인근 30평대 아파트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은 크루즈가 살던 모 아파트
“2005년 새로운 시도를 해봤어요.” 새로운 시도라,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태원도 좋지만 수원 홈구장과 거리가 너무 멀었어요. 더 좋은 곳이 없나 물색하던 중에 강남역 주변이 눈에 띄었습니다.” 2000년 이후 강남역 주변은 외국인 거주 지역으로 변모했다. 특히나 전문직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외국인 선수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왜 서비스드 레지던스(호텔식 서비스가 제공되는 오피스텔)라고 있잖아요. 강남역 주변에 그런 곳이 많았어요.” 현대는 그해 외국인 선수들의 숙소를 강남역 인근 서비스드 레지던스인 코아텔로 옮겼다. 외국인 선수들의 주거환경까지 신경 쓰는 게 진정한 투자라는 걸 보여준 첫 사례였다. 이후 두산과 LG도 외국인 선수 숙소를 코아텔로 옮기며 외국인 선수들의 성적향상에 큰 도움을 줬다.
성적부담과 세대교체 사이
크루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바쁘게 짐정리를 하는 그의 아내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잠시 뒤 이유를 알았다. 크루즈는 혼잣말을 하듯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쯤이면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말한 ‘저기’는 바로 야구장이었다. TV에선 삼성과 LG전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크루즈는 허탈한 표정으로 “아직도 삼성 유니폼을 입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더 이상 삼성의 외국인 선수도 아니었다. 크루즈는 퇴출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구단의 결정을 존중하고 있었다. “프로야구는 비즈니스다. 팀에 도움이 되질 않아 미안할 따름이다.”
선수단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온 크루즈는 말없이 삼성의 경기를 지켜봤다
크루즈의 퇴출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크루즈도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열흘 전(5월 11일) 대구 SK전에서 케니 레이번을 상대로 2점 홈런을 쳤다. 그런데 홈런을 치고도 코칭스태프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속으로 ‘방출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 뒤 의외로 말이 없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어제(20일) 퇴출 통보를 받았다.”
크루즈의 퇴출은 지난해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 장타력이 큰 몫을 차지했다. 지난해 한화에서는 22홈런과 장타율 5할5푼을 기록하며 강타자로 통했지만 올시즌은 각각 2홈런, 3할7푼2리로 단타자에 그쳤다. 고질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이 장타력 감소에 영향을 미쳤을지 몰랐다. 올시즌 들어 어깨가 좋지 않았던 것도 이유일 수 있었다. 그러나 크루즈는 A-4 용지 몇 장 분량의 변명을 늘어놓는 외국인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야구선수는 언제나 잔부상에 시달린다. 그것이 야구의 속성이기도 하다. 부상을 참고 이기는 것이 내가 할 일이고 실력이다. 그보단 심리적인 이유가 컸다.”
심리적인 이유라면 삼성 특유의 분위기일 수 있었다. 지난해 삼성에서 LG로 이적한 팀 하리칼라는 “삼성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팀”이라고 말했다. 역시 지난해 삼성에서 뛰다 올시즌 LG로 이적한 제이미 브라운도 같은 말을 했다. “삼성 시절은 하루하루가 악몽이었다.” 두산 입단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전 삼성 외국인 투수 브라이언 메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엄밀하게 말해 삼성 출신 외국인 선수들의 불만은 구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선동열 감독이 자신들에게 가하는 성적 중압감이 극심했다”고 털어놓기 일쑤였다. 브라운은 “선 감독은 외국인 선수가 슈퍼맨이 되길 바라는 이”이라며 “현역시절 화려했던 선 감독의 무용담을 들었지만 모든 선수가 그처럼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브라운은 LG에서 퇴출되기 전 “삼성을 상대로 꼭 완투승을 거두고 싶다”는 목표를 밝힌 바 있다. 지난해 선 감독이 자신을 가리켜 “5이닝 밖에 던지지 못하는 투수”라고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은 선 감독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후반기 선 감독이 갑자기‘앞으로 7이닝 이상을 책임지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7이닝을 넘긴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를 5이닝 투수로 전락시킨 건 선 감독 본인이었다. 몸이 아직 그 만큼을 소화할 여력이 안됐다고 하자 언론을 상대로 내가 자기에게‘5이닝만 던지겠다고 했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외국인 선수 크루즈는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짐을 싸는 게 몸에 익었다. 그의 살림살이는 늘 단촐하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본도 그렇다. 외국인 선수가 전력의 30%를 좌우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개의 외국인 선수들은 급변한 야구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외국인 선수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한 케이블채널 야구해설가는 “대선수 출신의 선 감독은 지나치게 완벽한 선수를 원한다”며 “그의 입맛에 맞는 선수를 찾으려면 메이저리그 페드로 마르티네스나 커드 실링을 데려와야 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덧붙여 “일본프로야구에서 자신도 외국인 선수로 뛰며 성적 중압감으로 고생했을 텐데 삼성 감독이 돼 외국인 선수를 다룰 때 보면 마치 철망에서 야수를 길들이는 사육사를 보는 것 같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선 감독을 비판만 할 일은 아니었다. 과거 삼성은 ‘외국인 선수에게 질질 끌려 다닌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 발비노 갈베스와 트로이 오리어리는 무단 이탈로 삼성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즉시 전력감으로 뛰길 바라고 그래서 영입한 외국인 선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과 맞지 않는 요구일 수 있다. ‘외국인 선수는 결과로 판단될 뿐’이라는 선 감독의 현역시절 일본프로야구 경험이 삼성을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끈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크루즈 미사일’로 불렸던 호쾌한 타격을 이제 볼수 없게 됐다
선 감독 부임이후 외국인 선수들이 성적 중압감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한 외국인 선수들이 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엄홍 과장에 따르면 현 삼성의 외국인 투수 크리스 오버뮬러는 오히려 선 감독의 야구스타일을 무척 존경한다.
문제는 어쨌거나 선 감독에 대한 외국인 선수들의 평가가 새로운 외국인 선수 영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대개 외국인 선수들과 에이전트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의견과 노하우를 주고받는다. 몇 년 전부터 삼성은 외국인 선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팀이 됐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재계약은 없다”는 게 이유다.
크루즈는 선 감독에 대한 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화는 야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분위기였지만 삼성은 부담이 많이 되는 팀이었다”며 “팀 분위기가 내가 반드시 잘 해야 한다는 쪽으로 쏠리다보니 오히려 그런 부담이 성적에 악영향을 준 것 같다”며 우회적으로 속내를 털어놨다.
퇴출 시기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크루즈는 자신을 가리켜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라고 했다.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때부터 그는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였다. 지난해 한화에서 뛸 때도 4월보다 5월 성적이 좋았고 5월보다 6, 7월이 더 나았다. 하지만 타선의 세대교체를 고려중인 선 감독으로서는 크루즈의 부활을 기다리기보다 젊은 타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 수 있었다.
“지금 삼성의 세대교체가 잘 이뤄지고 있다. 박석민은 장래 올스타감이다. 선 감독의 계획을 존중하고 행운을 빈다.” 크루즈는 자신을 “아직도 삼성의 팀 메이트”라며 “나보다 팀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야구인생의 끝? 2권의 시작일 뿐
크루즈는 “다른 구단에서 영입제의가 오면 돈에 상관없이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내의 내조로 2, 3년간은 선수로 뛰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덧붙여 미국으로 돌아가도 마이너리그에서 뛰며 메이저리그행을 타진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아무리 잘해도 대타가 고작이다. 그러나 한국, 대만, 일본에서는 주전으로 뛸 수 있다. 매일 야구를 하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크루즈의 진심이었다. 현실적으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화, 삼성에서 검증된 선수를 데려갈 팀이 없는 것이다.
크루즈는 “한국에서 뛸 수 없다면 일본프로야구 2군에서 무급으로 뛰다가 1군으로 올라가도 좋다”고 말했다. 본인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 그 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서 뛰는 거의 모든 외국인 선수들의 최종 목적지는 일본이다.
지난해 연말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뛰던 전 KIA 외국인 투수 세스 그레이싱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며 2년간 5억 엔(약 47억6000만 원)을 받았다. 두산 에이스였던 다니엘 리오스도 야쿠르트와 연봉 1억800만 엔을 받는 조건으로 1년 계약을 맺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마이너리그와 멕시칸리그에서 활동하는 에이전트들에게 그레이싱어와 리오스는 선수들의 한국행을 설득하는데 좋은 예가 됐다. 지금도 미 현지 에이전트들은 “한국에서 반짝 성공을 거두면 일본에서 거액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선수들을 현혹하고 있다. 듣기에는 불편하지만 이것이 프로의 현실이다.
크루즈는 동료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크루즈의 퇴출로 아내 지나의 상심이 크지 않을까 싶었다. 결혼 4년 차인 크루즈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삼성 측도 원정경기에 지나의 동반을 허용했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쁘게 짐정리를 하던 지나는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다시 남편에게 좋은 기회가 오길 바란다”며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크루즈 부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크루즈는 “야구에서 방출은 늘 있는 일이고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 모른다”며 퇴출을 통보받은 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들려준 말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가 들려준 말은 이랬다. “하나의 문이 닫히고 다른 문으로 들어갈 시기가 된 것 뿐이라고.”
크루즈 부부의 밝은 얼굴에서 퇴출의 아픔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지나가 임신 12주 상태였던 것이다. 남편의 해고가 아내와 태아에겐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역시 기우였다. 크루즈는 “출산할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을 계획”이라며 “그렇게 되면 아이에게 한국국적이 주어질 테고 성장해 야구선수가 된다면 나처럼 외국인 선수 규정에 묶여 정든 한국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대화 말미에 크루즈는 “연습을 끝마치고 선수들과 함께 농담을 할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며 “자신을 환대해준 대전과 대구 야구팬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료 선수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며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크루즈가 정성을 다해 쓴 글은 ‘If it doesn＇t hurt to loose the game you didn＇t play hard enough! CRUZ(느슨하게 경기를 하고도 지장이 없다면 당신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것입니다. 크루즈)’였다.
인생과 야구는 책과 같다. 크루즈의 야구인생이 한국에선 끝났지만 그것은 2권의 시작일 뿐이다. 크루즈 못지않게 많은 한국야구팬은 그가 어떤 선수였는지 먼 훗날 그들의 자식들에게 추억의 책장을 펼치며 설명할 것이다. 왜냐? 야구는 대를 이어 전수되는 영원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크루즈는 5월 26일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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