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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특별한 날

고작 세 시간을 자고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학원에 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평소에 안 가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덕에
아무 생각없이 360번 버스를 탔고
양재역 올라가는 길에서 버스가 거의 멈추다시피 해
내린 후에야 그게 양재역이 아니라 역삼역이었음을 알았다.

다행히 4분 지각하는 것으로 그쳤다.
다들 눈 치우느라 나는 신경도 안썼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행정실장님을 뵈러 갔다.
오늘은 실장님이 본부로 전속 가시는 날.
선물을 드린 후 실장님이 본인 인생 마지막 담배라고
주장하시는 담배를 함께 태워드렸다.
방에 있는 맥주와 소주를 주신다고도 하시고
티 잡아주실테니 3월 쯤에 같이 골프 치자고도 하셨는데
골프를 싫어하긴 하지만 이 기회에 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음을 먹은지라 공부를 시작했는데
눈을 치우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때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후의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열두 시간 동안 제설했다'.
이번 주까지 무려 운.영.통.제.실.장. 이지만 어차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수송대대 전병력을 이끌고 활주로로 향했다.
난 내가 삽질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아니었다.
하긴 뭐든 열두 시간이나 하면서 즐거운 게 이상한 거지.
나중엔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추워서 하는 수 없이 삽질을 했다.
40명이나 되는 아가들 과자 먹이고 인솔하고 소리 지르고 삽질하고
하다보니 도저히 체력이 안 되어 혼나든 말든 때려치고 들어가기로
마음 먹은 순간 종료 방송이 나왔다.
몰상식한 군대같으니라고.
근데 신기한 건 병사들도 생각없이 일한다.
서울대 나온 녀석도 연대 나온 녀석도 생각없이 일한다.
뭐 덕분에 일이 오래 걸려서 시간이 딱 맞긴 했지만.

헤롱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 철기 형 생일에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선물했는데 이번에 읽었다고, 좋은 작품인 것 같다고.
내 평생 몇 안 되는 만점 짜리 책인데 아무렴.

집 바로 앞에서 자기 엄마와 차에 묻은 눈을 털고 있는 꼬마를 봤는데
곰돌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꼬마가 나를 돌아봤는데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오늘은 힘들어서 그런지 납치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전에 텔레비젼 보다가 귀여운 꼬마애가 나와 납치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어머니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며 버럭 화를 내셨다.
하긴 애 하나 더 키우기 힘드시겠지.
내 생각에도 나같은 애 하나 키우신 것만으로도 고생하신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꼬마애를 납치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베트남 달랏에서 묵은 호텔집 꼬마애였는데
대체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오늘도 조금 고민했다.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놓고 나중에 가서 일을 벌이는 것이 내 가장 큰
단점 중 하나지만 이번에는 맹세코 그냥 순리에 따르기로 했다.
아무튼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이 말은 마음대로 해석하세요.

써놓고 보니 왜 특별한 날이었던 건지 모르겠다.
아마 열두 시간 제설하면서 내가 군인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과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공부하고자 하면 공부할 수 없는 요인이
발생했기 때문인 듯. 내 생애 최고로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니
역사상 유래없는 폭설이 내리는 것을 보면 정말 하늘이 거부하나 보다.

그래도 꿋꿋하게 공부할 테다.
연애는 잘 모르겠어.
거부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한 발 내딛고 싶지 않을 뿐인지도.

무슨 일이든 생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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