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78 　14/20

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두려움 설렘 그리움

학교 근처에 가면 잊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난다.
마치 오랜 여행 끝에 자기 집 현관문을 들어서며
익숙한 체취와 느낌을 느끼듯 학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면
나는 다시 오래 전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달리 말하자면, 조금 더 분명한 말로 하자면 나는 다소 우울해진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아쉽고 슬프고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더이상 두려워하지도, 설레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불안, 불만.
두려워하고 설레어 했고 그리워했던 오래 전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
마치 차갑게 식어버린 욕망 앞에서 무언가 간절히 욕망하기를
또 다시 간절히 바라는 평소의 나 자신의 모습처럼.

그래,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도 설레어 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아.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그런 현상태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 익숙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너무도 자연스레 내 온 마음을 사로잡는 그 그리움이야말로
정녕 견디기 어렵다.

나는 이미 두려워하거나 설레거나 그리워하기에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렸다.
언젠가의 순진했던(차라리 바보같았던) 나는
언젠가의 불안해 했던(사실은 겁이 많았던) 나는 더는 없다.
나는 언제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엇이 나를 괴롭힐 수 있고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순수한 기쁨에서 터져나오는 아름다운 말들은 이제 없어.
그러니까 수줍어하며 힘겹게 건내던 진실했던 말들은 이제 없어.
그렇지만 모든 것이 추한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다.
나는 예전과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고
예전과 다른 것들에 설레어 하고
예전과 다른 것들을 그리워 한다.
그 감정이 내가 기억하는 오래 전의 격하고 순진하고 유치했던
감정들- 그렇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진실하고 또 순간적이었음 또한
결코 부인할 수 없다 - 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내 안에 있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한 내가 사랑하는 한
두려움과 설렘과 그리움은 그 어떠한 형태로든 내 안에 있으리라.

오늘 문득 스무 살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시절 내 삶에 후회가 있기 때문도 아니었고
지금 나의 삶에 불만이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오래 전 내 안에 살아숨쉬던 두려움과 설렘과 그리움이란
감정들의 격한 떨림이 그리웠기 때문. 그 그리움이 서글펐기 때문.

그것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


96	더럽혀진 슬픔	Giverny	2008/10/19	400

95	easy world	Giverny	2008/10/16	383

94	돌아보기	Giverny	2008/10/15	377

93	다시 쓰기 혹은 다시 읽기 # 3	Giverny	2008/10/15	307

92	다시 쓰기 혹은 다시 읽기 # 2 [4]	Giverny	2008/10/14	518

91	다시 쓰기 혹은 다시 읽기 # 1	Giverny	2008/10/14	1438

90	독후감 [1]	Giverny	2008/10/14	337

89	headache [59]	Giverny	2008/10/14	2036

88	싫어	Giverny	2008/10/14	344

87	포옹	Giverny	2008/10/11	388

86	no answer [1]	Giverny	2008/10/11	355

85	돌아오는 길 [1]	Giverny	2008/10/11	342

84	are you sure?	Giverny	2008/06/09	293

	두려움 설렘 그리움	Giverny	2008/06/06	364

[prev] [1]..[11][12][13] 14 [15][16][17][1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