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을 찾는 것은 무엇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나는 무신론자다. 신이 없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게 단정하고 있는 명제 중 하나다.)
까뮈의 '페스트'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의 중간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페스트로 삶의 모든 것이 멈추거나 거꾸로 흐르는 오랑 시에서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신의 길을 간다.
마치 치료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다시 다쳐 돌아왔을 때 회의를
느꼈던 한 의사가 어떤 선사를 만난 후 '난 의사니까'라고 말하며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던 것처럼 베르나르 리유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타루 또한 그런 인물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다르다. 페스트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리유에게 있어
사유 이전에 받아들여지는 일종의 정언명령인데 반해 타루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철학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인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행위를 하고 우정을 느낀다.
삶의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선한 마음을 타고 나고 어떤 사람은 선한 마음을
길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 목표지점이다.
까뮈는 화자의 입을 빌려 조제프 그랑을 '성인'이라 부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견뎌나가며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 옳고 그름을 논하기 이전에 매순간 본능에 따라
가장 옳은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성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까뮈가 사용한 3인칭 시점, 특히나 정체조차 불분명한
화자의 덤덤한 어조가 그런 인물들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까뮈는 3인칭 관찰자(정확히는 기록자) 시점을 사용하면서
작품의 무대인 오랑 시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한다. 인물의 감정에
빠져들지 않고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임을, 특수한 재난의 사태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처해있는 삶의 현실 그 자체임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작품을 읽으며 역설적으로 '좀 더 몰입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까뮈답지 않게 잔뜩 멋을 부린 묘사,
물론 그것은 까뮈의 묘사가 아니라 단지 화자의 묘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까뮈의 다른 소설들과 너무나 다르다.
낯간지런 묘사도 그렇지만 가끔 느껴지는 설교조의 어조 또한
부담스럽다. 게다가 작품 말미에서 타루는 갑자기 체게바라가 되어 버린다.
작품 내내 꾹꾹 눌러놓은 감정들이 사유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순간들이 종종 있어 순간순간 신파조가 되는 것이다.
자꾸 건방지게 글을 읽는 사람의 입장을 넘어서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비판을 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인상을
지워낼 수가 없다.
그리고 까뮈의 유약함은 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까뮈를 결국 좋아하게된 것은
그의 유약함 때문이기는 하지만...) 리유와 타루가 해수욕을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신파조 장면으로서 까뮈가 생각한대로
삶의 진리에서 만난 두 영혼의 결합을 보여주지 못한다.
(까뮈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그 바다...)
바다는 통제구역으로서 해수욕은 원칙적으로 불가다.
예심판사 오통 같이 자신의 절망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원칙에 묵묵히 따르는 인물을 그려놓고 리유와 타루 같이
훌륭하게 싸워낸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원칙을 위배하는가?
그리고 아무리 페스트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해도
리유가 발병한 타루를 자신의 집에 놓아두는 것이 옳은가?
나는 이 부분이 까뮈의 감상에 의해 잘못 들어간 부분이라 생각한다.
알제리 사태 앞에서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몰라 방황했던 까뮈,
프랑스인으로 태어나 알제리를 고향으로 한 까뮈,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또 그 때문에 비판을 받았던 까뮈.
그 까뮈의 글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유악함이나 신파조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까뮈는 종종 (실제의 자신과는 조금 다른) 자신의 글 속에서
종종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자신이 전혀 아닌 것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까뮈의 수필은 정말 너무나 싫다.
계속 안 좋은 이야기를 했지만 까뮈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충분히 느꼈다 생각하고 그 부분에 만큼은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희망이 있든 없든 살아나간다. 그리고 그 살아나가는 시간은
'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위해 쓰여야 한다.
내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의 접점을 갖는다면
그것은 죽음이 되겠지만 우리의 접점이 그 죽음 하나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아간다는 것이 하나의 접점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신을 언제 찾는가. 사실 그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는 점인 것이다.
원래 좀 더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한참 빠져있을 때
지하철에서 내려버린 덕에 생각이 많이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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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vern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2-26 1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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