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에서까지 장난질을 한 버나드 쇼의 작품.
버나드 쇼의 이름은 '배꼽' 시리즈에서 질리도록 봤지만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나는 일단 영문학 작품을 신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기로 마음 먹은 것은 죽는 순간까지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은 이 작가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내가 요즘 잃고 있는 그런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랄까.
희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는 것은 조금 위험하고 슬픈 일이란
생각이 든다. 과연 내가 작품과 작가에 충실하게 접근하고 있는지
의심이 생겨난다. 특히 직접 공연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대본이 너무도 훌륭할 때 그것이 과연 상연시에도 훌륭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객관적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마이 페어 레이디'와 '귀여운 여인'의 원작이다.
그리고 작품 자체의 모티브는 제목 그대로 그리스의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따오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해피엔딩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다.
버나드 쇼는 그런 '감상적 결말'을 싫어한다고 한다.
너무도 웃기고 재미난 이 작품은 그 '감상적 결말'을 피함으로써
그리고 세세한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심각한 주제들을 함께 나열하고 있다.
첫째로 언어학(정확하게 말하면 음성학)에 대한 고찰이 엿보인다.
애초에 줄거리의 시작은 굴지의 음성학자 히긴스와 인도 방언 전문가인
피커링 대령 사이의 내기에서 시작된다. 꽃 파는 처녀였던 엘리자베스가
과연 반년만에 상류층처럼 말할 수 있는가가 내기의 중점이다.
물론 이 내기는 히긴스가 이긴다. 빌어먹을 역자가 서문은 번역하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적어놓아 대충 읽어본 결과 버나드 쇼는 서문에서
다른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다루지 않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오직 그의 음성학에 대한 관심 뿐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사람을 결정하느냐, 그 사람 개인의 성품이 어떻게 말하느냐를
결정하느냐 혹은 환경 혹은 습관의 문제이냐의 실험이 이 작품
내에서 이뤄지고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 고찰이라 하기는 조금
어렵겠다.
그러나 버나드 쇼가 영국인들은 영어를 사랑하지 않기에
사랑하고 더 정확히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 것을
고려할 때 언어학이라는 작품의 시발점은 우연한 것은 아닌듯 싶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작품을 진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음성학 그 자체가 아니라 음성학을 모태로 파생되는 다른 주제들이다.
작품의 두번째 주제는 계급이다.
엘리자베스는 상류층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상류 계급에 어울리는
여자로 바뀐다. 이제 그녀는 예전의 하층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습관'이 바뀐 것이라 말한다. 그녀의 말을 계속
따라가자면 계급을 가르는 것은 그 계급 내의 '습관' 혹은 '관습'들이지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객관적인
히긴스 또한 증언해주고 있다.
또한 졸지에 졸부가 되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 돈이 없었을 때 자유롭고 행복했던 그는 '갑자기 연락하는
50여명의 친척들'에 시달린다. 이제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술을
마시지 못하고 '일년에 여섯 번 강연'을 해야한다. 계급이란 일종의
속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는 이 점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소위 중산층 혹은 상류층에서
본래의 인간에게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태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정의 요구와 그 요구에 의해 형성되는 습관들이 계급을 가른다.
버나드 쇼는 이 습관(관습)들을 비웃는다.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 질문을 던진다.
셋째로 이 작품은 두 가지 인간관을 대립시키고 있다.
히긴스의 경우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대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가 자신에게는 특별하기를 원한다.
이 두 입장 사이에 타협점은 없다. 히긴스가 고려하고 있는
범위는 인류 전체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대하고
사랑하고 있는 소수의 특정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생각한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버나드 쇼는 이 질문에 뚜렷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히긴스는 끝까지 독신으로 남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프레디와 결혼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둘 다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계속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타협하지도 못한다.
결국 두 인간관 사이의 적당한 지점을 향해 줄타기를 하여야 한다는
결론만이 남는다.
이 두 인간관 사이의 갈등은 내가 언제나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므로
(원칙적으로는 히긴스의 인간관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 작품에서 건드리고 있는 문제들은 사실 아주 다양하기에
내가 여기에 적은 주제들이 작품의 가장 주요한 주제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점은 이 작품이 구성, 유머 감각에서 최고이면서도
인간 삶의 주요한 문제들을 심도있게 비추어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결국 히긴스와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사고를 닫지 않고 계속 열려있게 만든 점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귀여운 여인 같이 결국 해피엔딩(버나드 쇼 말대로 다분히 감상적인)으로
끝나도록 각색된 작품(영화)도 나름의 장점이 있겠지만
훌륭한 원작이 있는데 그 원작은 모른 채 가볍게 각색된
2차 생산물의 장점만을 취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된다.
물론 나같이 원작만 감상하고 2차 생산물을 싫어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사람드링 쥴리아 로버츠는 알아도 버나드 쇼를 모른다는
것은 비극인 것 같다.
최고의 작품을 읽고 이렇게 두서없이 말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기에는 가슴이 벅차서.
바로 버나드 쇼의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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