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졸았나보다.
아직 덜 떠진 눈을 비비고 거울 앞에 섰다.
약간은 어리벙벙한 표정.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쳤다가 방안을 거닐었다.
역시 특별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아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에 화면이 뜨기까지 기다리다 생각을 했다.
'뭔가 걱정할거리가 있었나?'
뚜렷한 걱정이 없는데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지금이 몇시인지 잘 모르겠다. 무언가 할 일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일단 지금은 그저 싱긋 웃어주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싶은 기분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모니터 앞에 웬 이상한
것이 있다. 날개가 달리고 사람 같이 생긴 것이
요정이라 부를만하지만 요정이라 부르기에는 못 생긴
녀석이 하나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놀랍지도 신기하지도 않았지만 그 요정 녀석의
불만 가득찬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녀석을 한참 바라보았더니
그 녀석은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 녀석 등뒤로 나온
날개를 잡아 들어올리고 말했다.
"넌 뭐야 !"
"요정이지. 믿거나 말거나."
녀석의 건방진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다. 창문을 열고
그 녀석을 던져버힌 후 다시 창문을 닫아버렸다.
잠시 후 웽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녀석이 창문을
마구 두드려됐다.
"뭐야, 요정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거야?"
요정은 계속 투덜투덜댔다. 정말 귀찮은 녀석이다.
그냥 무시하고 음악을 틀고 게시판의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녀석이 문을 열려고 낑낑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이 조금 안스럽기도 하고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요정 녀석은 한참을 그렇게 노력하더니 지친듯 공중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외쳤다.
"좋아, 이 문을 열어준다면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겠어."
'바보 같은 녀석, 그런 말을 누가 믿나?'하고 생각하다가
왠지 모를 동정심에 창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좋아, 널 믿겠어."
"그래 얼마든지 소원을 말해보라구. 넌 요정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데 말야. 후회하게 될걸?"
"그럼 소원을 말할게. 내 소원을 100개 들어줘~"
요정 녀석은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야, 요정이 그런 장난에 놀아나는 그런 한심한 바보로 보여?
안돼, 그건 안돼. 그런 유치한 말장난을 위한 마법이 아니라구 !"
녀석이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조심스레 말을 건냈다.
"좋아, 하나만 말할게. 근데 지금 꼭 말해야만 하는거니?"
"그럼. 요정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네가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거울 앞에 서 있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을텐데......"
"응?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음...그건...시끄러, 어서 소원이나 말해 !"
"갑작스레 그리 말하니까 생각이 나지 않는걸. 정말로 꼭
지금 말해야하는거야?"
"그래, 그렇다고 했잖아. 빨리 말해주지 않으면 내 멋대로
해버리겠어." 녀석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정말 멋대로잖아. 왜 화를내는거야! "
"뭐, 그건 사과하겠어. 아무튼 빨리 소원을 말하라구!"
"음, 내일 아침 비가 왔으면 좋겠어. 새벽에 체조를 나가는 건
너무 귀찮거든."
"뭐야, 소원이 겨우 그런거란 말야? 멋진 남자친구라든가, 좋은
화장품이라든가, 돈벼락을 맞는다든가하는 좀 제대로 된 소원 같은
거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이봐, 다시 생각해보라구. 이런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아. 이런 멍청한 여자아이는 정말 처음이로군. 기회를
다시 줄테니 다시 말해봐.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야. 그리고 말이지,
다음부터는 거울 앞에서 그런 표정 짓고 서 있지 말라구 !"
"응? 아까도 그러더니 무슨 말이야? 내가 거울 앞에서 어쨌는데?"
"으음...아냐, 아무 것도 아니니까 빨리 소원이나 말 해!"
"뭐야, 대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는거야? 그리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으음, 여자아이의 그런 멍청한 표정을 보고서는 왠지 그냥 더 보고
싶었더란 말이지. 자, 이쯤 해두고 소원이나 말해."
"내가 좋다는 말인가?"
"바보같은 소리 그만하고 소원을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가버리겠어."
녀석은 꽤나 흥분한듯 보였다. 어리숙한 녀석 같으니...
"그냥 내일 아침 비가 오는 걸로 해줘,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좋아, 후회하지 말라구."
녀석은 기분나쁜 듯 소리를 지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멍청한 녀석...좀 더 좋은 소원을 고를걸 그랬나 생각했지만 그 바보같은
녀석한테 그 이상 기대하는 것도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6시 눈을 떴다.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화창한 날씨. 노오란 태양.
'바보같은 녀석, 역시 엉터리로군. 기대한 내가 바보같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서는 서둘러 체조를 하러 나갔다.
정해진 산책로로 멍한 정신으로 산책을 하고 있는데
눈 앞에서 뭔가 날아다녔다...앗, 그 멍청한 요정 녀석 !
녀석이 여전히 불만가득찬 얼굴로 먼저 말했다.
"음, 오늘 아침 비가 오게 하려했는데 말이지. 어쩌다 착오가
생긴 것 같아. 변명이 아니라구. 널 한 번 더 보려고 이런
실수를 한건 절대 아니라 이 말이지."
"뭐야, 별로 기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너의 말은 마치 날 한 번
더 보기 위해서 그랬다는 걸로 밖에 안들리는걸."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에겐 이 바보같은 녀석이
안보이나? 다들 그저 멍한 얼굴로 걷고 있다.
"아무튼 너 정말 소원을 들어 줄 능력이 있기는 있었던거야?"
"으음...말했잖아. 착오가 있었다고."
"착오는 무슨 착오 ! 자,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가 버려.
빨리 들어가서 다시 자고싶단 말야."
"......" 녀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땅에 내려오더니 주저앉았다.
조금 측은해져 걸음을 멈추기는 했는데, 사람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지나쳐 버리면서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야, 이러다가 혼난단 말야, 빨리 일어나 ! "
"음. 정말 실수니까 믿어줘. 내일은 정말 비가 오게 해줄게."
"아냐,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방해하지 말아줘. 그리고 내일 아침엔
내가 여기말고 다른 곳에 있을거니까 다음에 부탁할게, 안녕~"
체조와 산책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다시 푸욱 자고 일어났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검게 변해 있었고 거리는 너무도 어두웠다.
"에잇, 여러가지로 바보 같은 녀석이군."
혼잣말을 하며 거울 앞으로 갔다.
대체 내 표정이 어땠다는건지 사뭇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까 그 녀석의
표정이 생각났다. 좀 불쌍해 보였는데...어차피 녀석이 바보같았던 거니까
내 탓을 할 필요는 없겠지...
비가 정말 세차게 내렸다. 도저히 학교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도록 세차게 내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외쳤다. "이 멍청한 녀석, 누가 지금 오게 하랬어 !
당장 멈추라고 !" 그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멈췄다.
나는 놀라서 순간 그 자리에 서서 창 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했잖아 !" 순간 놀라서 옆을 보니 그 요정 녀석이
또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늘에 떠 있었다.
"비는 네가 그치게 한거야?"
"응, 그렇긴하지만. 아무튼 미안하다구. 아까 비가 안오고 지금 온 건 내 탓이
아니라구. 뭐,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만."
"그래, 고마워. 아무튼 소원을 들어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하면 더 미안하잖아. 제대로 된 소원을 말해봐. 이번엔 정말
실수 없이 해줄게."
"아냐, 괜찮아."
"정말로?"
"응. 대신 가끔 놀러와. 내 표정 구박하지도 말고."
"좋아, 약속할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쳤다. 룸메 언니였다.
"너 왜 멍한 얼굴로 거울 보고 서 있니?"
요정 따위는 온데간데 없었다. 꿈이었나?
약속은 유효한거겠지? 창 밖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런데 지금이 몇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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