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어보면
쥴리앙 소렐이란 녀석이 있어.
무려 170년 전에 날 따라한 무지막지한 놈이야.
따라하지마 !!!
라고 외쳐봐도 그 놈은 말을 안 들어.
170여년 전에 죽은대다가 소설 속의 인간인걸.
그 놈은 그러지 못하면 자기 방에 올라가 총으로
자기 머릴 쏴버릴 작정이었다는데
나는 계속 칭얼대기만 해.
그러고보면 그 녀석이 조금은 나은 면도 있어.
흥! 따라쟁이 주제에.
나는 영영 어른스러워지지는 못할건가봐.
멀쩡한척 하기로 새끼 손가락 꼬옥 걸고
약속해놓고 어느새 뒤돌아 바보 같은 짓을 해.
이제는 아닌척 하기에도 너무 늦었어.
2003년, 나쁜 년 ! 하는 농담도 질려버렸어.
어쩌면 난 그냥 아파하는걸 즐기는 변태일지도 몰라.
아니, 그럼에 틀림없어.
이제 책 같은 거 안 읽어.
천권쯤 읽었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아마 만권을 읽고나면 더 불행해질걸.
신문도 안 볼래.
나보다도 더 멍청한 인간들 얘기 투성인걸.
어제 어떤 애가 자살했대.
멍청하기는.
왜 죽니. 왜 죽니.
죽을 용기가 있다면 살아가란 말이야 멍청아.
국민학교 때 우리 반 여자애가 아파서 일본에 갔어.
걔네 엄마가 걔 생일 때 우리 반에 노트를 돌렸어.
애들은 마냥 좋아했어.
그 아이 생일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 아이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은 주제에.
그리고 나중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
조금도 슬프지 않았어.
난 아마 그 노트를 썼던거 같아.
죽어버려라 멍청아.
그 아이 이름이 산호였어.
그냥 웃기는 이름이라고 기억해도 되는데
떠올릴 때마다 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이름이 되었어.
웃기는게 뭔지 알아?
나는 그 아이보다 그 아이 어머니가 불쌍했어.
그 아이 어머니에게 너무도 미안했어.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인데
나는 20여년 전 그 아이 어머니가 이름 지을 때의
표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울어.
미안해서 마구 울어.
나 같은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죽을 용기 없으니까 갑자기 순식간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근데 그럼 아마 우리 엄마가 슬퍼하실거야.
그래서 못 죽었어.
앞으로도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난 겁이 많아서 못 죽어.
이래저래 이유가 많아서 못 죽어.
산호한테 미안해서 못 죽어.
노트도 다 써버린 주제에 다 쓰고 어딘가 버려버린 주제에
내가 감히 어떻게 죽어.
산호야 미안해. 산호야 미안해.
할머니가 어느 날 쓰러지셨는데
몇 번인가 전에도 그러셨기에 그냥 있었어.
그러다 왠지 슬퍼서 혼자 방에 들어가 방에 들어가 울었어.
그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난 펑펑 울었어.
펑펑 울은거 보니 난 분명 살아있었어.
그리고 작년에 수현이가 죽었어.
대회 준비할 때 나는 아픈 척 하고 자버렸는데
수현이는 2년 반 후에 죽어버렸어.
그 놈 장례식에 나만 안갔어, 뭔가 핑계를 대고 안가버렸어.
해준 것도 없는 주제에 안갔어.
그 녀석은 나한테 피자를 사줬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해줬어.
이제 피자를 먹으면 목이 메어와야할텐데
난 피자를 잘 먹어.
너무 잘 먹어. 콜라랑 같이 잘도 먹어.
엠에센에 150명이 차서 누굴 지울까 찾다보면
항상 그 녀석 이름이 나와
곧 죽을 놈 대화명이 '어흥'이래 미친새끼.
너무 웃겨서 슬플 때 웃으려고
아직까지 못지웠어.
병원에서 그 녀석 예전 여자친구가 펑펑 우는거 보고 조금 부러웠어.
그걸 보고 부러워하다니 난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야.
영은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 같이 병원에 갔어.
근데 난 병원에 가면서 엄수진 정장이 잘 어울린다 생각했어.
그게 다야.
난 그런 놈이야.
그 날을 회상하면서 영은이 표정은 하나도 기억안나면서
택시를 탔던 것, 엄수진 정장이 예뻤던것만 기억하는 한심한 놈이야.
산호야, 산호야 미안해 미안해.
너랑 말 한마디 안했던거 같은데 10년도 더 지났는데
널 기억해.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줘.
가끔 너 생각하면서 울어. 대신 너는 울지 말아줘.
누가 나보고 예쁘대. 내 기억 속의 너도 예쁜데.
근데 생각도 안나는 네 모습 예쁘다 기억하는 것 보다
너랑 통화할 수 있었으면 훨씬 기뻤을 것만 같아.
미안 미안. 사실 너 때문에 우는거 아냐.
그래도 가끔 네 생각하며 우는건 정말이야.
예쁘대, 예쁘대, 나보고 예쁘대.
그런 말 다 필요없는데. 그게 아닌데.
산호야, 요즘 종종 나 생각해.
너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그리 길지도 않은 영원할리 없는 삶에서
왜 나중에 아프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해야만 하는걸까.
그래서 나 너무 많이 미리 생각하지 않으려구.
산호야, 산호야 많이 아팠니.
내가 지금 아무리 아파도 너만큼 아플까.
기쁘지? 말해봐, 솔직히 조금 기쁘지?
내가 네 이름 기억해서 기쁘다고 말해봐.
괜히 친한 척 한다고 심통 부리는 것 아니지.
한 번도 말 안 건낸 주제에 이제와 친한 척 한다고 화내고 있는건 아니지?
그래, 너희 어머니가 나에게 노트를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나 너 기억하고 있지 않을거야.
그래서 더 슬퍼. 그 노트가 겨우 그런 의미로 남아서.
왜 인간은 어릴 때 그리도 멍청하고 잔인한걸까.
왜 너에 대한 기억은 그것 뿐인걸까.
산호야, 산호야
방에 혼자 있어서 참 좋아.
혼자 담배도 피고 혼자 술도 마시고 해서 참 좋아.
오늘은 너무 많이 폈고 너무 많이 마셨지만 그래도 참 좋아.
네가 살았던 만큼을 더 산 주제에
아프다고 징징댈 수 있어서 참 좋아.
울 수도 있어서 참 좋아.
아마 네가 날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그 때 나는 빼쩍 말랐었을걸.
네가 아파서 주사 맞을 때 나는 보약 먹고 살이 피둥피둥 쪘을걸.
참 역겹지 않니.
사실 아이들 보면서, 노숙자 아저씨들 보면서 슬퍼해놓고
비싼 옷 사고 좋아하는 내가 참 싫어.
죽도록 싫어.
너도 내가 싫지?
내가 널 기억하고 있다고 편 들어주면 안돼.
아무튼 안 슬픈 척, 안 아픈 척 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돼.
난 아직도 많이 어린가봐.
나 조금도 예쁘지 않지? 그렇지?
그것도 모르면서 나보고 예쁘대.
자기 멋대로 안된다고 못 박아놓고 예쁘대.
아무 소용도 없는 말 내 귓가에 박아놓고 아프대.
나도 아파.
근데 너만큼은 안아픈거 같아서 미안해.
편히 쉬는 너한테 너무 많이 칭얼댄거 같아 미안해.
미안해.
내 땡깡 받아줄 사람이 없어져서 너한테 조금 그래봤어.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는데
빌어먹을 회의가 또 있는데
아마 못 일어날 거 같아
아니, 일어나고 싶지 않아
내일은 또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을까 무섭거든.
이제 행복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 때
모든 것이 다 무너졌거든.
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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