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오후였다. 물론 애인 없는 김형준, 남용훈 그리고 나에게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엿같은 오후였다. 우리 셋은 갈 데도 없어
언제나처럼 과도 테라스에 죽치고 앉아 연방 담배를 태워댔다.
그러던 중 완벽한 2:8 가르마를 자랑하는 이성롱이 테라스로 들어왔고,
우리는 기분을 새로이 하여....담배를 피웠다.
이성롱의 2:8 가르마는 위상기하학적으로 완벽하고,
미학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하나 없는 그런 80년대 아저씨 스타일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2001년의 윤철기의 장발에 비견할 만 했다.
우리 넷은 드디어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과도로 들어섰다.
그러나 과도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웬 종이 쪽지가 하나 있었고, 2:8 가르마를 자랑하는 성롱이
그것을 펴 보았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술 값이 없어 너희 책을 가져간다.
-괴도 병옥-
아연 실색한 우리 넷은 당장 과사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과사로 뛰어들어
자초지종을 얘기했으나 두 조교는 그 날도 인터넷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과사무실은 인터넷 바둑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가끔 연애도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각설하고, 우리는 구시렁대며 다시 과도로 들어섰다. 텅 빈 책상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성롱은 가슴을 치며 외쳤다.
"괴도 병옥, 술 버릇만 나쁜게 아니었어 !! 내 책 돌려줘 !!"
그 때였다. 김형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 것은.
"현우야, 설록차 가져와라."
나는 그의 그 말을 듣자마자 곧 우리의 책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서둘러 설록차를 가져오자 김형준은
추리를 시작했다.
"일단 괴도 병옥이 이렇게 과도를 유린하도록 방치해 둔 우리의
책임이 큰 것 같다. 물론 술값이 없어 책을 가져간 괴도 병옥에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야. 어쨌거나 일단은
책을 찾아오는 것이 급선무다. 자, 일단 우리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괴도 병옥이 과도에 들어왔던 것은 분명해. 우리가
담배를 피우러 나오기 전까지는 책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괴도
병옥이 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우리가 테라스에 있었는데 과도에
들어와 책을 가져가는 것이 쉬웠을까? 아니야.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해답은 간단해. 바로 공범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이성롱이 테라스로 들어왔지?
이성롱이 테라스로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이성롱의 2:8 가르마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 괴도 병옥은 그 순간을 노리고 이성롱을
미리 테라스로 들여보냈었던 거지 !" 김형준의 말이 이어지며
이성롱은 거의 울먹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잠깐, 설록 형준. 어설픈 추리는 그만두시지.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려는 건가?"
"뭐야, 넌 누구냐?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열 번 우린 설록차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 김형준은 난데없이 등장한
괴인물의 일갈에 놀라 외쳤다. 그러나 괴인물이 대답했다.
"나는 라깡과 퀘벡을 사랑하는 윤철기다. 너는 방금 어설픈 추리로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려고 했어. 나의 라깡의 거울이론에
의거한 추리에 의하면 괴도 병옥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어.
그건 퀘벡에서 불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만 비추어봐도 자명한 일이지.
그리고 2:8 가르마를 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것도 너는 모르나 !
너는 추리의 기본이 안되어있다."
김형준은 난데없는 인물의 출현과 그의 언변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러나 설록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이내 추스리고
반론을 시작했다.
"너는 2:8 가르마를 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성롱의 가르마는 가끔 3:7로도 변하는 가변가르마다. 너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어. 물론 괴도 병옥이 주로 홀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번 범행은 분명 홀로 저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김현우 같은 정서불안형 인간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는 드물지.
물론 테라스에 서면 지나가는 여자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보통은 미친놈 처럼 가만히 못 있고 돌아다니곤 하지.
그런데 이성롱이 등장해 이휘향찬란한 2:8 가르마로 김현우의
시선을 집중 시켰어. 하필이면 왜 괴도 병옥이 다녀갔을 때 이성롱은
테라스에 있었던 거지? 결국 둘은 공범이었던거야. 달리 설명이
불가능해." 김형준은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마친 후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으로 설록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윤철기가 다시
반론을 펼쳤다.
"훗, 너는 아직 데리다를 읽지 않은 모양이군. 내가 라깡과 퀘벡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아니면 자네는 설록차를 너무 마셔서
정신이 혼미해진건가? 괴도 병옥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것 뿐이야.
괴도 병옥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지."
김형준과 윤철기는 끝없는 논쟁을 이어갔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잠자코 그 논쟁을 듣고 있던 남용훈은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이성롱을 패자. 그럼 불거야." 그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성롱의 2:8 가르마가 풀릴 때까지 우리는 이성롱을 밟았으나
이성롱은 끝내 아무 것도 불지 않았다. 우리는 이성롱이 공범이든
아니든 상관없으니 우리의 책을 되찾고 괴도 병옥을 붙잡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테라스로 나가 담배를 끝없이 태워댔으나 뾰족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려갔다.
세 대째 줄담배를 태워대던 나의 핸드폰이 울렸으니 그 전화는
바로 괴도 병옥의 전화였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지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혀...현우냐. 나 투다린데...술 값이 모자른다. 잠깐 와라."
우리는 서둘러 투다리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도망갈까봐
택시를 잡아탔고, 물론 택시비는 이성롱이 냈다. 그러나
막상 투다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괴도 병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epilogue
그 다음 날 차지연 양은 자신이 투다리에 쓰러져있는 괴도 병옥을
수거해갔음을 실토했다. 우리는 어차피 공부도 안하는데 책 몇 권
없어진게 무슨 대수냐며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를 보냈다. 사실은
책 몇 권 없어진 것보다 여자친구 없는 것이 더욱 서럽다고 생각했다.
* 현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3-18 2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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