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려가는 3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터벅터벅 기숙사삼거리에서
5동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3층 테라스에 남용훈과 김형준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5동 문으로 들어선 후
조금이라도 늦게 그 둘을 마주치자는 일념에 천천히 계단을 올랐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젠장, 낭패다'라고 생각하며
테라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형준이 흥분한 얼굴로 인사 대신
"남용훈 미쳤어"라는 말을 건냈다. 내가 "왜? 새삼"이라고 말하자
김형준은 "남용훈이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대"라고 말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돌아서 들어왔던 테라스 문으로 다시 나가려했지만
남용훈은 재빨리 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순간 이 인간이 날 돌려세워
키스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상상이 머리 속을 스쳐가며
동공이 확대되고 온몸이 얼어붙었으나 다행히 아니었다. 대신 남용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시작했다.
"자, 들어봐. 자, 세상에 70억 명쯤 존재한다 치면 여자가 35억 명쯤 되지.
그 중에 니네가 만날 수 있는 여자가 많아봐야 5천명쯤 된다고 치자, 맞나?
그 여자들은 정우성이나 장동건을 좋아해. 그리고 나머지 34억 9999만
5천명은 나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그 여자들은 다 나를 좋아하는데
니네랑 만날 일이 없으니까 니네가 그걸 알 수가 없는거제. 알겠나?"
남용훈을 테라스 난간 너머로 밀어버리고 싶었으나 예전에 이성롱을
난간에서 밀어 죽일 뻔 했던 경험이 다행히 나의 본능을 억제했다.
분위기는 수습되지 않았고, 우리 셋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과도서관으로
다시 들어왔다. 김형준은 진정이 안되는지 설록차를 가져와 마시기 시작했고
나도 내키지는 않았으나 설록차를 한 잔 마시는 수 밖에 없었다. 불쾌해진
마음을 내리누를 길이 없어 김형준과 나는 과사무실로 놀러갔다.
역시나 두 조교는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과사무실의 주요업무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주로 인터넷 바둑두기와
.......음....그것 뿐인듯하다.
과사무실에서 과도서관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남용훈의 천부당만부당한
헛소리의 충격은 가시지 않았고 겨우겨우 저녁 먹을 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셋이서 식사를 하러가던 도중 멀리서 한 여자가 오는 것이 보였다.
첫눈에 보아도 남용훈이 좋아할만한 여자아이였다. 남용훈은 역시나
"오, 딱 내 스타일이야"라고 말했고, 나는 설록차 한 잔이랑도 안 바꾸겠다고
생각했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손에 뭔가 종이쪽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오, 나에게 연애편지라도..."하고 나는 생각했다.
김형준과 남용훈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쨌든 그 여자아이는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우리를 스쳐지나가려는
찰나 힐끔 얼굴을 훔쳐보려는데. 여자아이는 대뜸 남용훈에게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주더니 수줍은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서 떠나지 않았다.
김형준과 나는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애가 수줍은 듯한
눈망울을 쉬지않고 굴려대던 중 내가 말을 꺼냈다.
"형준이형, 설록차 마시러 가자. 진정해야겠다." 그리고서는 대뜸 담배부터
한 대 물어버렸다. 그 때였다. 김형준이 눈이 다시 광채를 발한 것은.
"현우야, 설록차 빨리 가져와라"하고 김형준이 말하자 나는 드디어
김형준의 천재적인 두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알고 냉큼 뛰어가서
설록차를 가져왔다. 김형준은 담배를 한 대 꺼내물더니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용훈과 여자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김형준은
그런 둘을 무시하고 말을 시작했다.
"남용훈, 설록차를 마시는 나의 두뇌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건가.
정말 가소롭군. 지금 두 사람은 아마 내가 그것을 연애편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천만에 말씀. 물론 저 여자가
남용훈에게 쪽지를 건내주던 시점에는 그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나는 그 직후 저것이 결투장이거나, 빚독촉장이라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남용훈은 확실히
김현우처럼 여자관계가 난잡하거나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인물은 아니지."
"잠깐." 남용훈은 김형준의 말을 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우는
여자관계가 난잡하지 않아." 나는 남용훈의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고 같은 말이 이어졌다. "현우는 여자관계가 난잡한게 아니라
그냥 혼자 여기저기서 차이고 다닐 뿐이야. 난잡하다는 말은
성격좋고 잘생긴 나같은 남자의 숙명이지, 김현우에겐 어울리지 않아."
하더니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닥쳐, 떼뚜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것이 결투장이나
빚독촉장은 아니라는 결론에 나는 이르렀어. 그렇다고 그것이
연애편지일까? 아니지. 정상적인 여자라면 남용훈을 좋아할 수 없어.
그리고 남용훈이 아까 34억 9999만 5000명의 여자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34억 9999만 5000명의 여자가 선천적으로
정신적 결함을 안고 태어난다는 말인가? 그건 김현우 따위도
연애를 하고, 이성롱의 눈가에 다크써클이 사라지는 것만큼
말도 안되는 일이지." 김형준은 이렇게 말하고는 여자 쪽으로 돌아서 말을 이었다.
"이봐요, 아가씨. 도대체 남용훈에게 얼마를 받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짓을 했다가는 나중에 시집 못 가요. 설록차라도 한 잔
마시고 다시 생각해봐요. 돈이 궁해서 그랬다면 차라리 과외 자리를
알아봐요. 그리고 기왕 이런 짓을 할거라면 차라리 내가 낫지 않을까?"
여자아이의 눈망울에 물기가 고이는 듯 싶더니 그 아이는 씩씩거리며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김형준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승리의 표정을 지었다.
한편, 남용훈은 한 쪽으로 돌아서 여자아이가 남기고 간 쪽지를 펴기 시작했다.
쪽지를 펴자 그 안에 다른 쪽지가 나왔다. 남용훈은 바깥의 쪽지부터
읽기 시작했고, 우울한 표정과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러더니 다시 안쪽 쪽지를 펴서 읽은 후 나에게 건내주었다. 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반 ΧΧΧ라고 해요.
전부터 오빠의 다크써클을 사랑해왔어요~♡
저를 꼭 만나주세요 !!!
그리고 바깥쪽 쪽지에는 "부탁드려요, 성롱 오빠에게 전해주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쪽지를 김형준에게 건냈고, 김형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연신 설록차를 마셔댔다.
우리 셋은 그 날 저녁을 먹으러가지 않고 바로 과도서관에 올러가
가방을 싸고 각자 집에 갔다. 나는 이성롱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 나머지 둘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운 날이었다.
에필로그
다음 날 5동으로 들어서려는데 민선이가 말을 걸었다.
"오빠, 내가 아는 동생 친구가 성롱이 오빠 좋아해서 만나자고 쪽지
전해달라고 우리과반 사람한테 부탁했는데 미친놈 세명이서
지네끼리 생쇼하는 바람에 짜증나서 포기하기로 했대요."
멀리서 이성롱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선이는 "어, 성롱이 오빠다"
하며 성롱이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핸드폰 전원을 몰래 끄며
이성롱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 현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3-18 2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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