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천사들이 이주원의 앞에 나타났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세 명의 천사들이 이주원의 앞에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나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이주원을 찾아오곤 했던 천사가 먼저 말을 건냈다.
“오늘 함께 온 천사들은 제 동료 천사들입니다. 이렇게 함께 오면 당신의 마음이 조금은 강해지지 않을까 해서 함께 왔습니다.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습니까?”
“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모든 일엔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얼마 후면 그 때를 놓치게 됩니다.” 다른 두 천사 중 하나가 말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주원이 말했다.
“정말로 하루면 되겠습니까?” 나머지 한 명의 천사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단 하루만 더 주십시오. 제게는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이주원이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을 너무 다그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당신에게 가혹하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고 당신을 동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해내지 못하면 이 세상은 끝입니다. 기억해두세요. 당신이 해내지 못하면 당신의 아내도 당신의 아이들도 모두 끝이라는 사실을요.” 이 마지막 말을 마치자마자 세 천사는 다시 사라졌다. 이주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너무도 두려웠다.
두 달 전 일이었다. 별거중인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고 이주원은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가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주를 조금 마시고 막 잠을 청하려던 찰나였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그가 입맞추고 침대에 눕는 순간 그의 방문 쪽이 갑자기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이 부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면서 ‘누구야 !’하고 외쳤다. 빛이 조금 약해지자 그는 가까스로 팔을 치우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머리 위에 하얀 테가 둘러져 있고 어깨죽지에서부터 하얗고 길다란 깃털들을 잔뜩 달고 있는 생물이었다. 그 생물은 흔히 천사라고 불리웠지만 이주원은 그것을 천사라고 생각하기 전에 비명을 먼저 지르고 있었다. 이주원의 비명에 그 생물은 당혹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저는 대천사 라파엘입니다. 당신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만 그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유감이군요.” 천사라고 자칭하는 그 생물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놀라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당신에게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한 사람을 죽여야만 합니다. 아, 또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시면 안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전 인류의 미래가 걸려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선택받은 인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혈통이 선택받았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말하더니 천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알 수 없는 표정들을 연속해서 지었다.
“정말로 천사 맞나요?” 이주원은 여전히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의 교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불신은 지옥으로 가는 보증수표입니다. 의심하시면 곤란하죠. 그렇지만 당신은 선택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조금은 고려의 여지가 있겠군요.” 천사는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은 후 말을 이었다.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말씀드렸듯이 당신은 한 인간을 죽여야합니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할 듯 하군요. 당신은 악마를 죽여야합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믿겠습니다.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지옥은 보내지 말아주세요.” 이주원은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황급히 외친 후 말을 이었다. “제가 악마를 죽여야한다고요? 제가요?”
“네, 그렇습니다.” 천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왜 하필 저인가요? 저처럼 불운하고 약한 인간이 어떻게 악마를 죽인다는건가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설마 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버린다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겠죠?”
“안타깝지만 당신이 아니면 안됩니다. 사실 당신에게 이러한 소명이 내려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저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만…….” 천사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찬 후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자면 당신의 혈통은 앞으로 악마가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악마의 혈통을 끊도록 운명 지어져 있습니다. 물론 저희는 당신의 7대 조상들부터 끊임없이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도록 설득해왔습니다만 불행히도 당신의 조상들 중 아무도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 조상 탓이지요.” 천사는 또 혀를 차기 시작했다.
“제가 아니면 안되는건가요? 정말 제가 아니면 안되는건가요?” 이주원이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당신이 아니어도 됩니다. 다만 2대 후에 엄청난 악마가 태어나게 됩니다. 전 인류를 멸망시킬만큼 강력한 악마지요. 따라서 늦어도 당신의 아이들 중 하나가 그 소명을 완수해야만 합니다. 그 아래 대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 때는 이미 인류가 악마에 의해 사라진 후가 될테니까요. 따라서 당신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만 당신의 아이들 중 하나는 그 소명을 완수해야만 합니다.” 천사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 아이들이 말입니까? 제 아이들 중 하나가 그것을 해내야만 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말이죠.”
“전 제 아이들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제 아이들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도 두렵군요. 제가 죽여야하는 것은 정말 악마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악마의 할아버지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진짜 악마가 태어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죽여야하는 건 악마의 할아버지인 인간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당신 회사의 사장입니다.”
“네? 오, 신이시여. 그 분은 좋은 분입니다. 그 분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은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제가 이혼소송으로 돈이 부족할 때 큰 돈을 선뜻 빌려주신 분인데.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이들 중 하나가 그의 아이를 죽여야만 합니다.”
이주원은 큰 혼란에 빠졌다. 애원하는 듯한 얼굴로 천사가 서 있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해합니다. 다행히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앞으로 매일 이 시간 당신을 찾아오겠습니다. 하루빨리 당신의 결심이 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천사는 사라졌다. 방 안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천사는 매일 밤 같은 시각에 이주원을 찾아왔고, 오늘은 세 명의 천사가 동시에 나타나 그에게 소명을 완수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주원은 지난 두 달간 거의 매일 그랬듯이 또 다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같은 시각이 되자 다시 세 명의 천사가 찾아왔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세 천사 중 하나가 물었다.
“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이 짐을 떠넘기지 않겠습니다. 내일 밤 그를 죽이겠습니다.” 이주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내일 당신이 모든 것을 해낸 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세 천사는 기뻐하며 사라졌고 다시 또 어둠만이 남았다.
다음 날 이주원은 사장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노라고 말했다. 사장은 저녁 때 저녁을 함께 먹으며 얘기를 하자고 했다. 이주원은 친절한 사장의 미소에 가슴이 아팠으나 그의 아이들에게 이런 엄청난 고통과 갈등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퇴근 시간까지 그는 내내 식은 땀을 흘렸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칼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사장과 약속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사장을 만나 저녁을 먹은 후, 사람이 없는 길을 조용히 걸으며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장은 그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주원은 아이들을 되찾을 방도가 있을 것 같다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사장은 주의를 기울여 들으며 계속 걸었다. 두 사람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서던 순간 이주원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울면 쓰나. 아이들을 되찾도록 내가 힘써줌세. 힘 내게나.” 사장이 말을 마친 순간 이주원은 “죄송합니다”라고 외치며 준비했던 칼을 꺼내 사장의 심장에 힘껏 꽂았다. 너무도 많은 생각들이 순간 그의 머리 속을 흘러지나갔으나 그의 등 뒤에 빛나는 세 생물이 나타난 것을 이내 깨달았기에 그는 서서히 뒤로 돌아섰다. 그 곳에는 세 명의 천사가 서 있었다. 머리 위의 둥근 원과 어깨죽지의 하얀 날개가 인상적인.
“제가 해낸건가요.” 이주원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하며 어깨를 축 내리뜨렸다.
“아니오, 우리가 해낸거지요.”
“네?” 이주원은 놀라며 세 천사를 쳐다보았다. 아니, 머리 위의 하얀 원은 검은 뿔모양으로 , 어깨죽지의 하얀 깃털들은 부드럽게 이어져 어둠보다 더 검게 변해버린 세 형체를 보았다.
그가 식어가는 사장의 몸뚱아리로 놀란 시선을 서서히 옮기기 시작한 순간, 분명 이런 투덜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이번엔 너무 오래 걸렸군. 이제 겨우 스물아홉번째란 말야. 자, 서두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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