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 이야기는 설록 형준의 유구한 추리 인생에 한 점의 누가
될까봐 글로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그의 활약상만큼이나
그의 실수 또한 잊혀져서는 안되기에 이제라도 적게 됨을 밝히는 바다.
중간고사가 얼추 끝난 봄날의 끝자락이었다.
망할 벚꽃이 모두 져서 한숨 돌리는 찰나 관악의 잡초들은
파릇파릇해져 다시 나의 가슴을 쑤시고 있었고 설록 형준과
기타 등등 모두 여전히 여자친구 하나 없는 우울한 집단인 채 지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과도 앞 테라스로 올라가자 설록 형준은 남손상과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재빨리 담배를 한 대
꺼내물고 벚꽃이 한창일 때 벚꽃나무를 불태우지 못한 나 자신의
게으름을 한탄했다. 삼년 연속으로 벚꽃 떨어질 때 당신들과
담소를 나누느니 과도의 우울한 원혼이 되겠노라며 내가 열변을
토하던 그 때였다. 복도 저 끝에서 괴상한 그림자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열변을 터뜨리던 중 설록 형준과 남손상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있음을 깨닫고 그때야 그 괴상한 그림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괴상한 그림자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휘청거리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평소 멀리에 있는 여자가 예쁜지 안 예쁜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 연습에 충실했던 나였다. 나는
그가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괴도 병옥이다 !"
나의 외침의 메아리가 과도와 과사의 얇은 벽을 통과하여
두 조교의 귀에 닿자마자 두 조교는 인터넷 바둑을 그만두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설록 형준과 남손상도 이미 괴도 병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순식간에
괴도 병옥에 이르렀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생포되었는데
우리가 난폭한 괴도 병옥을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 이상으로 술에 취해 걸음조차 제대로 못가누고 있었던
덕이었다. 우리 다섯 사람은 괴도 병옥을 아무도 없는 과도에
가두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궈놓은 채 괴도병옥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은 사살해야한다는
나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되었고, 간지럼을 태워 고문하자는
남손상의 의견 역시 호응을 얻지 못했다. 두 조교는 잠시 토의에
참여했으나 인터넷 바둑의 승률을 걱정한 나머지 이내 과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남손상과 나는 설록 형준의 의견을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설록 형준은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설록차를 가져올 것을 부탁했다.
설록 형준의 고견을 어서 듣고팠던 나는 재빨리 설록차 한 잔을
만들어 왔다.
"그래, 이 맛이야"를 연신 되뇌이며 설록 형준은 눈을 감은 채로
설록차의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잠시 입을 씰룩이더니 장광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괴도 병옥은 평소에 후배들에게 음주를 강요하고,
극악무도하게도 연애까지 하고 있지. 우리처럼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것까지 호사스럽게
누리고 있는 괴도 병옥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내 생각에는
정자호와 무제한 데스매치를 시키거나 100일 동안 술과 담배를
금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100일 동안 술과 담배를 금하면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난폭한 괴도 병옥을 이렇게 손쉽게
체포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어. 이 기회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돼. 괴도 병옥이 더 이상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경우 나의 연애에도 심각한 지장을 초해하게 되지."
그러고도 설록 형준은 끝없이 말을 이었으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신변잡기적이고 얼토당토 않은 말들이었으므로 여기서는 대충
위와 같은 말들을 했었음만을 밝혀둔다. 아무튼 나와 설록 형준과
남손상은 괴도 병옥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과도의 자물쇠를
풀고 과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뿔싸 ! 괴도 병옥은 과도 안에 없었다. 우리가 괴도 병옥을
잡아두고 30여분을 내리 그 앞에 서 있었음에도 괴도 병옥은
과도를 탈출해 우리의 손을 다시 떠난 것이다 !
설록 형준은 똥씹은 표정을 하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다시 열었다.
"설록차 한잔 더 !" 그는 다소 화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고
나는 서둘로 설록차를 새로 한 잔 가져왔다. 설록 형준은
설록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과도 구석구석을 돋보기로
살폈다.
"이 문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분명해. 우리가 그 앞에 계속
서 있었고 자물쇠도 채워져 있었으니 틀림없지. 그리고 바닥은
시멘트니까 바닥으로 도망갔을 리도 없어. 천장은 너무 높고,
뚫고 지나갈 수 있을 리도 없어. 그렇다면 좌우 벽면이 남아있는데
좌측 벽면은 계단 쪽과 통해져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돌로 되어있지.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과사와 통해있는 오른쪽 벽면 뿐이다 !"
설록 형준의 탁월한 두뇌가 다시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남손상과 나는 감탄한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오른쪽 벽면은 나무로 되어있어. 그래서 가끔 두 조교의
신음소리와 괴성들이 들리지. 특히 이현석 조교의 노래소리를
정말 참기 어려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벽면이 매우 얇다는 것이야.
요즘 괴도 병옥이 이상하게 과도에서 공부를 늦게까지 오래했는데
아무리 시험기간이라도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
그렇다면 결국 그 동안 괴도 병옥은 과도에 혼자 남아 저 벽면을
이용해 비밀통로를 만들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군. 모든 가능성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언제나 결론이지. 괴도 병옥은 저 벽을
통해 사라진거야. 틀림없어 !" 설록 형준은 드디어 결론에 이른 듯 했다.
그러나 남손상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저 벽을 통해 어디로 사라졌다는거지?"
"알다시피 저 벽은 과사로 통해져 있고, 만약 괴도 병옥이
저 벽을 통해 과사로 들어갔다면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느라
정신이 없는 두 조교의 뒤를 통과해 유유히 과사 문으로
나갈 수 있었겠지. 자, 저 벽을 잘 조사해보자." 설록 형준의
말을 듣던 중 나는 창문이 열려있음을 깨달았고, 그에게
그 사실을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김형준은 그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을 달았다.
"괴도 병옥은 걸음조차 제대로 주체못할 만큼 취해 있었어.
그리고 여기는 2층이야. 예전 사건에서도 창문으로 탈출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했던 적이 있지. 창문 앞쪽의 공간은 매우
좁아서 주의깊게 걷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어. 아무리 괴도
병옥이라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저 곳으로 도망가는 것은
무리지. 그의 조력자 차지연이 사다리라도 가져왔다면 또 모를까.
그러나 괴도 병옥이 과도에 갇힌 후 탈출하기까지는 길어야
30여분. 그 안에 차지연이 사다리를 가져왔을 가능성은 없어.
그만한 사다리는 인문대 가까운 쪽에는 없고, 차지연이 옮기기에는
너무 무겁거든."
설록 형준의 결론에 감복한 남손상과 나는 서둘러 오른쪽 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우리는 괴도 병옥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은 포기한 채 그 비밀통로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괴도 병옥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설록 형준은 과사로 들어가 바둑에 집중 중이던 두 조교를
추궁해보았지만 두 조교도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남손상과 나는 포기한 채 과도 책상 위에 드러누웠다.
설록 형준은 괴도 병옥에게 당한 패배에 어쩔 줄 몰라하며
분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남손상과 나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어느덧 배가 고파져 왔으나
우리는 감히 설록 형준에게 말조차 걸 수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오른쪽 벽을 조사했고, 심지어는 자꾸 바둑두는 것을 방해받아
귀찮아하는 조교들이 괴도 병옥과 내통한 것이 아닌가하는 엄한
의심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설록 형준의 좌절이 극도로 고양되어
우리가 숨죽이고 있던 그 때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하여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5동과 6동 사이 쪽으로 앰뷸런스가 들어왔고 사람들이
서둘러 들것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왔고 곧 우리 바로 아래의 화단에서 멈춰서 있었다.
그 곳에는 괴도 병옥이 X자로 쓰러진 채 있었던 것이다 !
훗날 괴도 병옥은 그 날 자신이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그 일로 인해 설록 형준은 충격으로 설록차 열 잔을 내리 마시고 화장실에
며칠동안 가지 못했으며 남손상과 나 역시 충격으로 평소에 안하던
공부를 이틀이나 연속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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