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오늘 조금 늦었네?"
"응. 잠깐 일이 있었어."
"뭐야.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니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숨기는 거 없는데. 가끔 그런 일이 생겼으면 하긴 하지만."
"말하는 게 어째 좀 수상한데?"
"잠깐 놀이터에 있다 왔어." 남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놀이터? 놀이터는 왜? 혹시 잘렸어?" 아내는 놀란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설마. 무슨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그래.
집에 들어오는 길에 놀이터를 지나고 있는데 어떤 남자애가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거야. 바람도 선선하겠다 나도 잠깐 타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여태 그네 타다 온 거야?"
"정말 의심이라도 하는 눈치네. 왜 그리 따지듯 묻고 그래.
그네는 일 분밖에 안 탔어. 남자애 옆에 앉아 그네를 타는데
돌아보니까 아이 표정이 꽤 심각하더라고. 계속 그 녀석 표정을
보고 있다보니 어린 녀석이 뭐가 그리 고민일까 궁금해졌어."
"아무튼 오지랖도 넓으셔." 아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열세살 쯤 되어 보였어. 나도 그때는 그런 표정을 종종 지었던 것 같아.
그래서 더 말을 붙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그 나이의 남자애들은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거든. 또래의 아이들은 너무 거칠고 어른들은
그저 아이 취급만 하니까. 그리고 나중에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에게 따뜻한 아빠가 되주고 싶은 마음에
말을 걸었지."
"당신도 그랬어?"
"거칠었냐고?"
"아니, 대화 상대가 없었냐고."
"응. 그냥 친구들은 많았지만 섬세한 감정을 나눌 상대는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누나가 있었으면 했지 항상."
"내가 누나 해줄게."
"그건 사양하겠어."
"왜? 내가 기껏 선심 쓰는 건데."
"누나한테는 뽀뽀 못하잖아."
"웬일로 귀여운 소리를 다 하네. 아무튼 그래서 그 아이랑 얘기하다 온 거야?"
"응."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정말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대."
"하하 귀여워라."
"그 얼굴을 봤으면 그런 말 못했을 걸. 세상에 첫사랑에 번민하는
남자아이의 표정보다 심각한 건 없다고."
"아, 그러시는 당신의 첫사랑은 누구신지요?" 아내는 놀리듯 물었다.
"당신." 남편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서투른 거짓말은 접어두시고요. 그래서 뭐가 고민이었대?
여자애가 그 애를 안 좋아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였어. 그런데 조금 황당한 부탁을 했더라고."
"무슨 부탁을 했는데? 멋진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달려와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거?"
"설마. 당신은 그 나이에 그런 걸 상상했었나 보지?"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빨간 스포츠카에 장미 천 송이."
"그래도 나랑 살고 있는 거 보니 철이 조금은 든 모양이네."
"아니. 아직도 꿈꾸고 있어."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어떨 거 같은데?"라고 하며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아내를 바라보았다.
"계속 이야기 해봐." 아내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채근했다.
"별을 따다 달라고 했대."
"뭐라고?" 아내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별을 따다 달라고 했대." 남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애는 어떻게 했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대. 황당하지?"
"응. 너무 황당한 걸. 그 정도 나이의 여자애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해줬어?"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이아 반지'라고 생각했지."
"뭐야, 당신 너무 속물 아니야?"
"결혼 전엔 안 그랬어. 다 당신 덕분이지. 그럼 당신은 뭘 떠올렸는데?"
"다이아 목걸이."
"못 들은 걸로 해둘게. 어쨌든 다이아 반지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 애한테 그렇게 말해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잠깐만 생각을
해보겠다고 이야기했지. 그러니까 '아저씨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그 애는 저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라고 하더라고."
"그 애가 싫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부탁을 할 거 같지는 않은데.
조금 어이없긴 하지만 아마 진심이었을 거야. 감수성이 풍부한 앤가봐."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좋은 시 하나를 적어서 편지와 함께
보내라고 말해줬어."
"뭐야, 그건 당신이 나한테 써먹은 방법이잖아."
"당신처럼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애 같았으니까. 물론 그 방법이 그아이에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당황해서 그런 말밖에 해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끝?"
"응. 거기서 끝이야. 그리고 아이와 헤어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당신이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면 나는 당신에게 뭘
해줬을까 생각했어."
"당신은 저에게 뭘 해주실 건가요?" 아내는 놀리듯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을 따다주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그럼 그렇지. 당신에게 뭔가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아내는 살짝
삐친 듯 비난조의 말투로 말했지만 남편은 못들은 척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별을 따온다 해도 별이 너무 커서 당신이 들고다닐 수 없을 거야.
아니, 별을 가져오다가 지구가 통째로 그 별에 끌려갈지도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마 당신만의 별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다이아 목걸이 사주는 거야?" 이번에도 남편은 못들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눈을 감고 생각해봐. 저기 창 너머 별들 사이에 블랙홀이 하나 있어.
그 블랙홀 안에서 내가 횃불을 하나 들고 걷고 있지.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어. 나는 빛의 속도로 빨리 걷고있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라 그만큼 시간은 늦게 흘러. 아마 당신이 죽은 후에도,
어쩌면 지구가 사라지는 그때까지도 나는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겠지.
시간이 지나 '사건의 지평선'을 지나면 당신은 나를 더는 볼 수 없게 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일 거야. 그러니까
최소한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아니 거의 영원에 가까울만큼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들고 있는 횃불이 그곳에서 타고 있을 거야. 진짜 별은 아니지만,
블랙홀은 빛을 흡수하니까 전파망원경 같은 걸로도 잘 안 보이겠지만
어쨌거나 저기 우주 어딘가에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당신만을
위해 빛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 거야." 남편은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쑥쓰러운 듯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별로 낭만적이지는 않은 것 같네. 기껏 생각해낸 게
블랙홀이라니."
"블랙홀로 들어가서 화이트 홀로 빠져나올 수도 있는 거지?"
"응? 응. 어쩌면." 블랙홀까지는 어떻게 가냐는 둥 거기서 어떻게
횃불이 타오르냐는 둥 혹은 빛의 속도는 무슨 당신이 뛰기나 하면
다행이지 하고 뭔가 또 비난의 말에 대비하고 있다가 의외로
차분한 아내의 말투에 놀란 남편이 말했다.
"그리고 이 곳과 모든 것이 똑같지만 시간만 다르게 흐르고 있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응. 양자역학적으로는 그래." 남편은 조금은 담담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 화이트홀은 아마 다른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거야. 아마 우리가
사는 곳과 똑같은 우주도 어딘가 있을테고. 그러니까...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그곳에 도착한다면, 결국 다른 우주에 도착하게 된다면 말이야.
그러면 말이지...그곳엔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아니라 꼭 당신이 보냈던 시간만큼만 기다린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난 말이지. 나만의 별을 갖기보다는 당신이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정말?" 남편이 아내를 살짝 끌어당겨 안으며 이렇게 묻자 아내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당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난 별보다 다이아 목걸이가 좋은데
당신이 아니면 누가 사주겠어?"
* Givern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10-03 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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