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위의 질문은 결코 넌센스나 삶의 우의를 담은 선문답이 아니니 진지하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생각해 본 후 이 글을 계속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더라면 기차나 비행기 같은 대답을 기대하셨으리라. 그러나 내가 기대하는 답은 ‘빛’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 답에 미리 부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리학적으로 가장 빠른 것은 빛이지만 거기에는 이미 하나의 전제가 이미 놓여져 있다. 바로 ‘진공 상태 하에서’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빛이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이동한다 말하는 것은 우주가 거의 진공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며, 빛의 속도를 논의하는 것은 천체물리학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빛’이라고 내가 기대했던 답변에 이르렀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광자는 물이라는 매질 속에서는 그 속도가 느려진다. 그리고 물 속에서 한해 전자 중 푸른 빛을 내며 빛보다 빨리 이동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체렌코프 복사라 부른다. 그따위 사실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되묻고 싶어지셨다면 다음 질문에 다시 대답해보시기를 바란다. 물론 다음 질문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될 리는 없지만.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어떤 형태인가?
이번에 내가 기대한 답변은 ‘직선’이다. 그리고 이번 역시 애초부터 ‘당신은 틀렸소’하고 비아냥거릴 생각이었다. 위상기하학에서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측지선’이라 불린다. 2차원이나 일반적인 3차원 평면에서의 측지선은 물론 직선 형태이다. 웬 뚱딴지 같은 이야기냐고 다시 또 투덜대실 것인 분명하기에 더욱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설명을 이어 하도록 하겠다.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을 찾아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빛을 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의 궤적을 따르면 가장 짧은 선이 나온다. 그러나 그 선이 직선인 경우는 별로 없다. 그 이유는 공간이란 중력에 의해 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파리까지의 최단거리 항공로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지구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궤적은 곡선의 형태를 띤다. 속 편하게 땅을 뚫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예상하고 있으니 거기까지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더라도 꼭 그 질문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럼 들은 걸로 하고 계속 설명을 이어나가겠다.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은 곡률을 갖는데 그 곡률은 음의 값을 가질 수도 있고 양의 값을 가질 수도 있다. 음의 값을 가지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채 안 되고 양의 값을 가지면 그 반대가 된다. 땅 밑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을 벗어난 부분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생활하며 경험하는 범위에서는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고 믿고 살아도 무방하다.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운동장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해 보시라. 두 사람 사이는 아무리 봐도 직선이지만 한 명이 정신이 나가서 파리까지 달리고 헤엄쳐서 다다른 후 두 사람을 이어보면 그 선은 지구 위로 예쁘장하게 놓여있는 곡선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땅을 뚫고 파리까지 가지는 못 한다. 같은 이치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완벽한 3차원 공간이라 인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셨다면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주시기를 바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애써 부인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다음의 이야기는 아주 뻔하고 쉬운 이야기니까.
여태까지 왜 이렇게 길고 무의미해 보이는 사실들을 얘기했는지를 고백할 때가 왔다. 위의 두 이야기를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빛이 가장 빠르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진공 상태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라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 이야기는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 선은 직선이 아니며,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는 3차원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더 던지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우리도 모르는 전제들을 깔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어머니는 내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 여기저기 자랑스레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윗집에 산다는 어떤 친구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우리 어머니께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노라고 복수(?)를 하셨다. 솔직한 경험담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IMF 때 그 이름을 삼천리 강산에 널리 떨친 JP모건에 입사해 연봉이 3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배고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졌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노라고 자랑하는 대신 우리 아들은 정말 행복하다고 웃으면서 자랑하시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다. 혹은 우리 아들은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기특해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자신이 부러워하는 사람은 오직 타인의 삶과 마음을 소중히 할 줄 알고 그러지 못할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삶에 많은 전제를 깔고 산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돈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남들보다 똑똑해야 한다...등등. 그렇지만 우리가 정말로 원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는가. 사실 세상은 결코 3차원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런 전제들을 아무 생각 없이 끌어안고 있는 쪽이 더 쉽기에 그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저 행복한 것 그 자체 아니었던가.
그런 전제들 하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3차원이라고 그냥 대충 믿고 살아간다면, 자신이 들어갈 삼각형 하나를 그리는 것쯤은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주위에 작은 삼각형 하나를 에둘러 그려낼 손발이 없는 사람을 위해 더 큰 삼각형을, 더 큰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이 공부를 계속해 나가는 사람의 운명이자 의무이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 혹은 그러기를 강요받는 - 그 무수한 전제들을 이해하고 끝내는 지워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더 큰 세계를 바라보고, 그 법칙과 우리의 자그마한 세계의 법칙과의 차이점을 인지하며 진정 옳고 진정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문학을 공부하든 자연과학을 공부하든 그것이 더 큰 세상을 이해하고 품에 안음으로써 하나의 진실한 인간이 되기 위함임을, 그리고 그 진실한 인간이란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며 그것을 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에게 강요되는, 나 스스로 강요하고 있는 모든 바보 같은 전제들을 무시하고 싶다. 언제나 나는 행복하다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행복한 것은 나와 모든 생명과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소중히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삶에 유일한 전제가 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이 최소한 나의 마음만큼은 소중하다는 사실뿐임을 내가 잊지 않을 수 있기를 차가운 바람에 간절히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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