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쓰다가 만 글이다.
유치해서-_-;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상태였다.
취직은 됐으나 입사까지는 1개월여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그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매일매일이 지루함의 연속이었고
그 때 그 일이 일어 났던 것이다.
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이 적은 시간대를 골라 지하철을 타곤 했다. 그리고는 보통의 남자들이 으레히 하듯이 곁눈질로 여자들 얼굴을 훔쳐보곤 했다. 그것은 습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본능이었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친구와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었던 듯 하다. 조금 늦었다 싶어 서둘러 지하철을 탄 후 시계를 봤다.
11시 26분. 어차피 몇 정거장만 가면 목적지에 닿았기에 멀뚱멀뚱 서 있다가 언제나처럼 나도 모르는 새에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고 있었다. 통통하고 발그스런 볼을 가진 여자애가 보였다. 청바지를 접어 올리고 옆으로 매는 가방에 뭐가 그리 바쁜지 아주 빠른 속도로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마른 스타일을 좋아하는 데다가 시끄러운건 질색인지라, 그리고 청바지 접어 올리는 것은 거의 혐오하는 수준이었기에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쪽에 아주 살이 찐 아줌마 하나가 보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면 다들 그렇게 된다. 하지만 비만은 자신에게 무책임한 자들의 것이다. 역시나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니,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아줌마 옆에 앉아있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에 시선이 갔다. 한눈에 봐도 많이 피곤한 듯 하다. 고개는 끄덕거리면서도 눈은 어떻게든 뜨려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을 짓는데 어느새 목적지를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내리면서 졸고 있던 여자를 다시 한 번 돌아보려는 찰나 누군가가 나를 스쳐 달려갔다. 졸고 있던 여자였다. 졸다가 겨우 목적지에 맞춰 일어났나보다. 그 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어찌 그녀의 얼굴을 그리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맹세코 그녀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도달했으나 친구는 나오지 않았다.
30분쯤 기다리니 전화가 왔다. 나올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연거푸 사과하는데 화낼 수도 없어 결국 거리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너무 추워서 근처의 작은 교회로 들어갔다.
나는 무신론자였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었다. 그 날은 그 해 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고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다소 망설이다 교회로 들어섰다. 마침 예배 시간이었는지 사람들도 많았고, 무신론자인 주제에 무작정 들어와 열심히 기도 드리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가까이에 보이는 빈자리로 서둘러 걸어가 자리를 차지했다. 제일 뒤쪽이라 그런지 비교적 사람도 적어서 주위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친구녀석한테서 밥이라도 뜯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 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사람이란 그런 경우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옆 자리에 앉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게 마련이다. 아무 생각없이 올려다 보았을 때 내가 본 것은 아까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던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앉더니 이내 곧 아까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났는데도 그녀가 계속 졸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를 깨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요, 예배 끝났는데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네...네에?" 나도 잠에서 덜 깬 얼굴로 그녀가 대답했을 때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됐다. 나도 모르게 계속 말을 했다. "이 교회 다니시나 봐요? 아까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시던 분 맞죠?" 장난끼가 발동해 짖궂게 물었지만 그녀는 이내 여유를 되찾고 대답했다. "아, 네에. 아까 지하철에서 졸았었죠. 근데 저 이 교회 안 다녀요. 추운데다가 너무 졸려서 잠깐 들어왔어요."
"풉, 정말요? 사실 저도 추워서 들어왔어요. 오늘 정말 너무 춥네요."
"네, 기독교 신자도 아닌데 춥고 졸립다고 이렇게 들어오다니 좀 부끄럽네요. 아까 지하철에서 졸았던 것도 그렇고 말이에요."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아, 네에. 그냥 우울해서 무작정 걸어다닐 생각으로 왔는데 너무 춥네요." "괜찮으면 같이 칵테일 한 잔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그 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됐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잘됐다는 듯이 나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칵테일 바로 들어갔고 (너무 추운 날이었다 정말로), 그녀는 롱아일랜드아이스티를 시켰고, 나는 맨하탄을 주문했다.
칵테일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몸을 녹였다.
칵테일이 나왔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칵테일 고마워요.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날 저처럼 혼자 방황하다 교회로 들어간 사람이 또 있다니 신기하네요. 바쁘신거 아니에요?"
"아, 친구에게 바람 맞았어요. 바쁘긴요. 지금은 하는 일도 없는걸요.
재밌는 인연이네요. 같은 지하철을 타고 와서 같은 거리를 헤매다가 같은 교회에서의 랑데뷰!"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쪽 이름은 뭐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시작이었는데도 우리는 그 후로
1년여를 계속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스무살이 넘어가면 한두살 차이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우리처럼
어릴적부터 삶을 즐기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점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너무도 게으르고, 그녀는 너무도 부지런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에 있어서는 그 반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벽을 마련했고, 대신 그 반대편으로만 에너지를 쏟았다. 이를테면 난 일부분에 있어 그녀를 완전히 만족시켜주었지만 그만큼 모자란 부분과 대조가 되었고, 그녀는 그쪽으로만 온통 신경을 쏟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나는 그녀가 언제 떠날지 몰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녀 집과 우리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서로의 집을 왕복하면서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십여번쯤 왕복을 한 후에는 어딘가 앉아서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이 익숙해질 때부터 그녀는 쓴웃음이 늘었다. 나는 종종 왜 쓴웃음을 짓냐고 묻곤했다. "왜 그렇게 웃어? 내가 보는게 싫나봐?" "아니, 너와 내가 정면에서 마주 보는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그 순간 이별하게 될거 같아서."
"무슨 말이야? 그게 어때서 그래? 옆모습도 예쁘다는 말이 듣고픈거야?"
"아니, 그게 아니야. 서로를 마주 보게되면, 그만큼 우리는 서로의 등너머만 보게 될거고, 얼굴만 보게 될거고, 그렇게 시선을 서로 교차시켜나가면 가까워지는게 아니라 더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거야."
"잘 이해 안돼......"
"사랑이 서로 바라보는거야?"
"그런거 아닐까? 서로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지겹게 않은 그런거."
"아냐, 그럼 우리는 오래 같이 있지 못할거야. 나는 햇볕이 살짝 내리찌는
한낮에 믿을 수 없을정도로 새파란 잔디로 덮인 언덕 한가운데서 너와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보고 싶어. 태양은 적당히 구름으로 덮여서 우리가
하늘을 봐도 눈부시지 않고, 옷 하나만 덮으면 춥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가끔 양치기 소년이 양을 몰다 말고 우리를 힐끔 쳐다보면 좋겠어. 같은 곳을 보지 않으면 언젠가는 어긋나는 시선에 질려버릴거야. 서로의 시선을 맞추려 노력하다 잘 안되면 짜증도 나겠지. 난 그냥 네 눈을, 네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네 옆에 최대한 붙어 앉아서 먼 곳을 바라 볼래. 난 그렇게 하고 싶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어, 난. 그냥 지금은 네 얼굴만 보고 있을래. 나에겐 그게 제일 좋아."
"너 편한대로 해. 언젠가 우리의 엇갈린 시선은 지구를 수십바퀴쯤 돌아서 서로 마주칠 때가 오겠지. 언젠가는 말야......"
그 이후로 우리는 종종 공상을 하곤 했다. 특히 내가 직장에 다니게 된 후부터는 둘이 어디 여향을 가는 것도 힘들었고, 그만큼 공상의 시간은 늘어만 갔다. 비라도 오면 우리는 조용한 커피숍을 찾아가 지겨워질 때까지 공상을 하고 놀았다. "자자 생각해봐. 네가 취미로 하고 있는 그 악기 있잖아. 전자 오르간 말이야. 그걸 원시부족들이 사는 마을에 가져갔다고 생각해봐. 그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글쎄, 그걸 원시부족들이 사는 마을로 가져간다는 거 자체가 우스운데?"
"이건 공상이야, 공상.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켜서 생각해봐."
"이건 너무 말도 안돼, 그냥 쓰레기로 취급될거야 아마. 문명세계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고. 전자 오르간이란 건."
"네가 나에게 너무도 소중한 이유를 알아? 난 전자오르간이야, 아무도 어찌해야할지 모르지. 마치 그 원시부족들처럼. 하지만 넌 알거든. 난 전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리고 화음을 낼 수도 있고, 음색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
"풉, 조금 감동적이긴 한데 유치한걸."
"그래 조금은. 넌 언젠가 좀 더 다루기 쉬운 악기를 찾을테지. 문명세계든, 아프리카 한 구석에서든 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악기를 말야. 있잖아, 난 너무 영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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