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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Giverny
Homepage   http://everever.net/utopia
Subject   # 5
"못하겠습니다."

"못하겠다고? 별로 미안하지 않았나보군."

"아닙니다. 너무나 미안해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천 번을 미안하다고
말해도 돌이킬 수 없을테니까요."

"자네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걸 돌이키려고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괜찮아. 다시 해보게."

뱅은 다시 솥으로 다가가 솥의 가장자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흐릿한 물 위로 오렌지 향이 일었다. 뱅은 오렌지 향을 한숨
가득 들이마시고는 가볍게 웃었다. 그새 살짝 마른 눈물 때문에
피부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말했다.

"미안해."

솥 내부에 반사되어 윙윙 울리는 수십수백번의 '미안해'란 말이
뱅의 귀에 들려왔다. 뱅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말했다.

"미안해."

조금 커진 소리로 내뱉은 미안해란 말이 이번에는 솥 바깥으로도
조금 새어나간 것 같았다.

"미안해."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뱅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다음엔 또 뭘 넣어야 하나요?"

"편지를 쓰게나."

"무엇을 적어야 하죠?"

"그냥 자네의 마음. 자네의 간절함만 담겨 있으면 돼."

"편지는 여태 수십 통을 썼습니다만. 매일 한 통씩 그녀의 집
우체통에 넣고 왔는 걸요. 아마 태어나서 쓴 편지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쓴 걸 겁니다. 저는 손으로 글씨 쓰는 걸 안 좋아하고
편지 같은 건 낯 간지러워서 안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수십 통을 썼는데 아무 소용 없더군요."

"잔말 말고 쓰게."

"아무 말이나 써도 됩니까?"

"그래 아무 말이나 쓰게. 진심만 담겨 있으면 돼. 저기 책상 위에
공책이 있으니 아무데나 한 쪽 찢어서 쓰게"

뱅은 책상에 다가가 공책을 한 장 찢고는 웃옷 안 주머니에서
펜을 하나 꺼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났는지, 두 사람이 어디에 갔었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무엇이 섭섭했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언젠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지금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여태 썼던 수십 통의 편지에
몇 번이나 적어온 말들이었지만 여전히 가슴이 아련했다.
이쯤에서 그만 써야지 하고 생각할 때마다 자꾸 할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편지는 앞도 뒤도 없이 뒤죽박죽인 내용으로
자꾸 길어져만 갔다.

"이제 그만 쓰고 이리 주게."

'아직 쓸 말이 많이 남았습니다."

"말이 많아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모든 일은 적당히 해야하는 법이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는 없는 거야. 다 해서도 안 되고."

"알겠습니다. 날짜만 적고 드리겠습니다."

뱅은 서둘러 편지를 끝내고는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편지를 받더니 쭉쭉 찢어 오렌지 향이 나는 눈물이 살짝
섞인 액체에 담갔다. 액체는 아무리 봐도 먹을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뱅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 아가씨가 좋아하는 게 뭐지?"

"와인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때 와인 관련 책도 사서 공부하고
이것저것 사마셔보기도 했었죠."

"그래? 추억이 담긴 와인은 있나?"

"네. 처음으로 같이 마셨던 2001년산 라 포레와 그녀가 싸게 구입했다고
좋아했던 에쎄조가 생각나는군요. 에쎄조는 소중한 사람과 마시는
거라고 말해줘놓고 결국 저랑은 마시지 않더군요. 그게 지금까지도
상처가 됐습니다만 그것도 추억이 담겼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상관없네. 가서 내 와이너리에서 그 두개를 꺼내오게나."

"네? 와이너리도 있으십니까?"

"나한테는 없는 게 없다네.
저기 구석의 쪽문을 열면 와이너리네. 어서 가져오게나."

뱅은 노인이 말한 구석의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이너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여서 정말 이런 집에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와인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찾기 쉬웠다. L 항목을 찾자
그곳에 2001년산 라 포레가 있었다.

2001년산 라 포레는 그녀와 처음 마셨던 와인이었다.
뱅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와인을 좋아했다.
그들이 처음 함께 와인을 마신 날 와인 바에서 15분이나 고심하고선
골라낸 것이 라 포레였다.
그 날 그녀가 코르크를 열자 은은한 향내가 퍼졌는데
전에는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는 진한 향이었다.
그녀는 코르크를 한참 살피더니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고는 코르크에 묻어 있는 와인 향을 맡게 해주었다.
뭐가 뭔지 잘은 몰랐지만 그냥 좋았다.
그날 뱅은 처음으로 와인이란 것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2001년산 라 포레가 특별한 와인이 된 것은
그가 그 날 그녀와 그것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는 에세조 또한 찾아내고 다시 원래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그렇게 설명까지 해주고는 애꿎게 그에게 마시자고
하지 않아주었던 에쎄조 병이 왠지 미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뱅은 노인에게 와인 두 병을 건넸다.

"지금 이 두 와인을 열어서 잔에 따라 자네에게 준다면 자네는
어떤 것이 라 포레인지 맞힐 수 있을까?"

"아닐 겁니다. 저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나?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강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것은 후각이라네."

"그럼 한 번 시도해보도록 하죠."

노인은 익숙한 솜씨로 두 와인을 차례로 열어 잔에 따라
뱅에게 건넸다. 뱅은 노인이 왼손으로 건넨 와인잔을 먼저
받아 그 향을 들이마셨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그 향은
자꾸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오래 전 그 밤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져갔던 와인향 만큼이나  짙은 그리움이 다시 살아나
뱅의 마음을 눌렀다. 와인이란 건 그녀에 대한 애정이었고
2001년 산 라 포레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랬다. 그건
2001년 산 라 포레였고 그는 자신이 마시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2001년산 라 포레로군요."

"그래, 어떻게 알았나?"

"그 날 저녁 나눈 이야기들과 탁자 위에 있던 촛불,
피부에 닿던 공기의 느낌 그리고 표정까지 하나하나 다 떠오르더군요."

"그럼 이번엔 이쪽 걸 마셔보게."

노인은 오른손에 남겨져 있던 에쎄조를 뱅에게 건넸다.
뱅은 이번에도 코로 살짝 향을 맡아보고는 이내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습 마셔보았다.

"이건...그다지 좋은 지 모르겠군요."

"그건 거기에 추억이 없기 때문이지. 그 와인은 좋은 거야.
단지 자네가 그 와인을 함께 마실 거라고 언제나 기대해왔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 와인이 좋은 거라고
인정할 수 없는 거지. 역시 노인네가 젊은 아가씨 대신은 안 되는구먼
허허허."

"아니,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역시 저한테는 맞지 않는군요."

"그 아가씨랑 마셨더라면 좋다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네. 내 장담하지."

"아마 그럴 것 같긴 합니다. 그럼 두 병 다 쏟아넣습니까?"

"아니 한 병만 넣을 걸게."

"그럼 추억이 깃든 2001년산 라 포레를 붓도록 하겠습니다.
아쉽군요. 이걸 더 마시지 못해서인지, 옛날 추억이 떠올라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뱅은 그렇게 말하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라 포레 병을 들고
솥으로 걸어갔다. 그때 노인이 뱅을 제지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닐세. 우리가 넣을 건 에쎄조라네."
* Givern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2-0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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