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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Giverny
Homepage   http://everever.net/utopia
Subject   fictionary #2
# 1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묻지 않으셨다.
대신 언제나 이렇게 물으셨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내가 "대통령!" 혹은 "판사!"라고 대답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으셨다.
"아니,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어릴 적에는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나 판사가
옳은 대답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한단 말인가.
그럴 때마다 겨우 생각해낸 대답은 "부자? 유명한 사람?"하는
아버지의 동의를 구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시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 하시곤 했다.

아버지 자신은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도 판사도
아니었고 부자도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다. 심지어 잘 생기거나
키가 크지도 않았고 친구들이 "우리 아빠는 사장님이야",
"우리 아빠는 멋있어"라고 말할 때
대응할 말 하나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미 말했듯이 내가 어렸을 적부터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하고 묻고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고개를 젓는 그런 이상한 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2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대답에 반응을 보이셨던 것은
열 살 되던 해 추석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 -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젼에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어린 동생을 혼자 힘들게 키우는 소년가장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채널에는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 프로그램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다른 채널로 돌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텔레비젼을 열심히
시청하시는 부모님의 표정을 보니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 화장실에 앉아있다가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기로 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눈치를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묵직한 저음으로 말씀하셨다.
"다른 거 볼까?"
  나는 깜짝 놀라 "네?"하고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다른 재밌는 거 보자고."
아버지는 왜 그리 놀라느냐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씀하시며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시다가 뭔가가 생각나신 듯한 표정으로
갑자기 텔레비젼을 끄시고는 또 질문을 던지셨다.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불편하지?"
나는 그냥 솔직히 대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네...조금 그런 것 같아요. 가슴도 답답하고."
"아빠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사실."
"그럼 왜 보고 계셨던 거예요?"
"너랑 같이 있으니까."
"제가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빠한테는 네가 알아야할 것들을 가르쳐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아빠도 참고 보는 거야."
"제가 알아야 할 것이 뭔데요?"
나의 질문에 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더니 언제나 던지던 그 질문을
다시 또 던지셨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나의 심정은 조금 전에 텔레비젼에 나온
그 아이처럼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렸어도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부자요."
"왜 부자가 되고 싶은데?"
아버지가 나의 대답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던 덕분인지
나는 용기를 얻어 계속 대답할 수 있었다.
"가난하면 아까 그 아이처럼 불쌍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러면 그 아이는 계속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거야?"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부자가 되면 그 애도 부자로 만들어 줄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나는 아버지가 착하다고 칭찬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씀을 이으셨다.
"그럼 네가 부자가 못 되면?"
"될 거예요!"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할 것이란 듯 말씀하시는 아버지에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곤란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럼 부자가 되지 않으면 그 아이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진심으로 그 아이를 위해서 부자가 되고 싶은 거야?"
나는 그때 '네'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지금도 감사한다.
나는 '네'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몇 번이나 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거의 울먹이기 직전까지 가서야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때 아버지는 무릎을 굽히시고는 나를 꼭 껴안으셨다. 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신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버지가 미웠고,
겨우 참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때 아버지가 나를 안고 했던 말씀을 나는
아직 모두 다 기억한다.
"아빠는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도 좋아. 대통령이 되어도 좋고
판사가 되어도 괜찮아. 부자가 되든 가난한 사람이 되든 상관 없어.
아빠가 바라는 건 언제나 한가지야. 네가 너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삶을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항상 걸어가는 것, 그것 뿐이야. 아빠는 너한테 뭐가 옳다고, 뭐가
틀리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건 네가 살아가며 깨닫고 스스로
정해야 하는 거니까. 네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그 걸로도 괜찮아.
아까 텔레비젼에 나온 아이를 위해서든, 네 자신을 위해서든 말이야.
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최대한 고민하렴.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그렇게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 뿐이야."
아버지는 나를 꼭 안은 채로 한참을 계시더니 조용히 일어나 내 이마를
한 번 쓰다듬으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눈물에 가려 아버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고
이내 잠이 들었다.

#3
만약 그 날 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너무나 순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밤이 내 오랜 고민이
시작된 날인 것은 맞다. 나는 그 날 이후 꽤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살아왔다. 적어도 내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될 때쯤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아버지가 그때
하시려던 말씀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전에 현실과 충분히 타협했고, 나 자신에게 수많은
변명을 허락한 후였다.
아버지는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다시 묻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내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살아가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그런 아버지의 바람 그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씀은 어린아이에게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고
그래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에는 내가 이미 너무 많은 선택들을 한 후였던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내게 질문을 던지실 것 같은
예감이 들고는 했다.물론 나는 이제 아버지가 그렇게 물어오셔도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슬프게도 아버지의 질문에
당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것에 익숙해진 덕일 테지만.

#4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내 아이에게도 항상 질문을 하곤 했다.
아버지가 하셨던 그대로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본인도
그렇게 살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보기에는 대단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그런 삶이지만 자신에게 언제나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할 때마다, 그들을 보며 불편한
기분을 느낄 때마다, 그러면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볼 때마다 왠지 서글퍼지는 그런 삶 말이다.
아버지는 그때 내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셔야 했다. 내게 더 많은
것을 말씀해주셔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자신의 삶을
내게 이해시켜주셨어야 했다.

#5
어느 날 저녁 책을 읽다가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의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주고는 또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아이는 내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연예인!", "의사요"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데 이 날만은 아이가 그렇게 대답하지 않고 대신 내게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항상 그렇게 질문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아빠는 어떤 사람이 됐어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던가.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해왔던 수많은 변명과 이미 오래 전에 지나온 수많은
선택의 기회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결코 아버지가
기대했던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스스로를 속였고, 착한 사람이 되는 대신 나쁘지 않은 자신에
만족하며 살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솔직히 대답해야 했다.
이제 예전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된 내게 아버지는 물으시겠지.
"너는 어떤 사람이 됐니?"
그리고 나 또한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아버지에게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내 마음에 올려놓은 짐을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6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계셨다. 그 날도 나를 누운 채로 맞으셨다. 하지만 부자지간에
나눌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통의 부자 사이가 그렇듯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많은 정을 나눈 사이가 아니었다. 할 말은 줄어갔고
침묵의 간극이 길어지면서 나는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초조함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속이 타들어간 후에서야
나는 비로소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아이와 나눴던 이야기, 아이에게 들었던 그 질문에 대해.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면 물으리라. 아버지에게 대답을 들으리라.

이제 내가 이미 어떤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아버지에게 고해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래서 넌 어떤 사람이 됐니?"라고
물어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묻지 않으셨다. 질문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가 수십년 동안 아버지의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변명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질문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 Givern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1-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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