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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욕실의 시계

욕실의 시계가 사라졌다.
지난 십수년간 언제나 십분에서 십오분 정도 빨랐던 그 시계는, 신기하게도 몇 년 전 가족 중 누군가 - 당연히 어머니시겠지만 - 단 한 번 시간을 맞췄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십분에서 십오분 이 빨랐다. 절대 그 이상은 더 빨라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 누구도 그 시계를 정확히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8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날이면 그 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 머리를 하고 있으면 늦지는 않으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그런 놀라운 효과가 있는 시계였다.

아무튼 욕실의 시계가 사라졌다.
시계가 사라진 걸 깨달은 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온 밤이었는데 그토록 취한 상태에서도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분홍색의 둥근,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그런 시계였는데, 단 한 번도 시간이 맞은 적 없는 시계인데 뭐가 그토록 황망했던 것일까. 어째서 욕실 시계 따위가 4년간 바로 옆에서 일하다가 며칠 전 갑자기 휴직에 들어가신 선배보다 나에게 더 허전함을 느끼게 만든 걸까.

그렇다고 욕실에 시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계가 없어서 허전한 것은 분명한데, 시계가 걸려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못대가리만 보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한데 그 자리에 다른 시계를 사서 달아야겠다는 생각은 신기하게도 전혀 들지 않는다. 잃고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아 그 어떤 시계도 너를 대신할 수 없다는 애잔한 비통함으로 가득찬 것도 아닐진데...

아무튼 간에 욕실의 시계가 사라졌다.
어쩌면 올해 내게 일어난 일 중에 가장 큰 사건이다. 그 생각을 하자 내가 꽤 오랫동안 아무 것도 잃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제 대학교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내가 썼던 글을 좋아한다고, 조금씩이라도 다시 써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며 정말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적는 첫 글이 욕실의 시계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 기분이 좋다. 이제 다시 무언가 가져야겠다. 이제 다시 무언가 적어야겠다. 이제 다시 이제 다시 이제 다시- 언제나 첫 문장을 적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 오랜만에 끄적이고 보니 마지막 문장이 어렵다. 괜찮다, 언젠가부터 삶이 너무 쉬웠던 것 같으니.

이제 누가 와서 읽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나는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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