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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rny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기억의 습작

지난 주 십몇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몇 가지 거짓말을 했다 -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또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진실의 은폐를 거부한 덕에 전 여자친구에게 탈탈 털린 이야기를 한바닥 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 네 기억이 어째서 왜곡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서는 웃으며 묻어뒀던 진실을, 소개팅 상대가 한 이야기를 바로 다음에 만나서 하나도 기억 못하는 기억력의 소유자인 나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 마냥 이유없이 명확하게 기억나는 진실을 고백하자면.
첫째, 네 기억과 달리 나는 중학교 때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대학에 가서 첫 번째 여자친구에게 감정(짜증)을 조심스럽게 빙빙 돌려 적은 것이 내가 처음으로 길게 쓴 글이었으니까. 십 몇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보니 기억력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닌 지도 모르겠다.
둘째, 네 기억과 달리 내가 설국을 처음 읽은 건 중학교 때가 아니라 대학교 1학년 때다. 두 번째 수업이었나- 교수님이 "설국은 누가 썼죠?", "금각사는요?"라는 (빌어먹을, 이걸 불문과 수업에서 왜 물어보는건데 싶은) 질문을 던지셨을 때 두 번 모두, 두 명이 동시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라고 대답했던, 그 자리의 나머지 삼십여명에게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을 그 충격적인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경제학과 졸업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기억과는 상관없이 이것만은 오롯이 나만의 거짓말이었는데, 네가 혹시 읽었냐고 물어 본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사실 그 책이 처음 나온 십여년 전에 초판본을 사서 읽었고 지금도 내 방에 있다. 물론 그때는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았었고, 최근에 소설이 영화로 나오면서 -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을 때만치 입을 벌린 채 - 다시 읽었지만.
앞으로 살면서 이렇게 먼 기억을 더듬을 일이 몇 번이나 더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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