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作.
예전부터 제목만 들어오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사실 며칠 전 일이다)
SF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냥 순수문학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SF 적 요소라고는 시간이동과 외계인의 등장 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정신착란 증세일 뿐이다.
작품은 블랙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심오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빌리는 못생긴 발렌시아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앓고 있는 병의 여러 증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자기가 그녀에게
청혼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고 평생 반려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을 때 자기가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그 나라 국민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가난한 미국인들은 자신을 미워하도록 종용 받는다. 미국의
유머작가 킨 허바드의 말을 빌리자면, "가난하다는 것이 수치는
아니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너무 밋밋하고 너무 느슨하다.
물론 이 작품의 주제는 너무도 분명하다.
자신의 인생이 외계인과 시간이동 덕에 바뀌었다고 믿는
주인공 필그림의 모든 망상이 실은 그가 겪은 전쟁의 참담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 5도살장은 그가 독일군에게 잡혔을 때
갇혀 있던 곳이다. 그 도살장은 필그림의 목숨은 앗아가지 않았지만
필그램의 자아를 앗아갔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대개는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따라서 작품이 재미없어진 것은 일견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그가 하려던 것은 그저 '보여주기'였으니까.
내가 처음에 이 작품을 순수문학으로 부르는 편이 낫다고 한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내가 읽기 곤혹스러워하는 (그리고 사실은
거의 건드리지 않는) 대부분의 영미 장편처럼 이 소설도 꽤나
지루하다. 어떻게 보면 그 지루함 가운데 잔잔히 드러나는
필그램의 망상이 과연 진실인지 망상인지 독자들이 담담히
읽어나간 후 (이 부분이 나에게는 부적절해보인다) 마지막에 가서야
다분히 분명해 보이는 암시로(암시가 아니군...) 그것이
분명 그의 망상이었음을 드러내어주는 충격 요법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별로 그런 느낌을 못 받았지만 말이다.
필그림의 망상 중 첫번째는 시간 이동이고 두번째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사건이다.
시간 이동은 서술 상의 주요한 기법으로 사용된다.
현재의 그의 모습과 과거 그가 경험한 것들을 교차서술하면서
전쟁이란 것에 억지로 밀려나간 그가, 실제로는 사람을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락으로 떨어져간
그가 어떻게 미쳐가는지 드러난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가
주장하는 그 시간이동이 진실인지 아닌지 독자에게 궁금즘을 남긴다.
필그림은 외계인에게 납치 당하여 동물원 같은 곳에서 사육되는데
그곳은 차라리 그에게는 천국이다.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는 차라리 행복하다고 느낀다. 지구의 유명 여배우도
그곳으로 납치되어와 그와 사랑에 빠진다.
필그림은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는
이해받지 못하는 쪽이 행복한 것이다.
필그림을 납치한 후 자신들의 별로 데려가며
외계인들과 필그림이 나눈 대사도 꽤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을 인용해 본다.
"승선을 환영하오, 필그림 선생," 스피커가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빌리는 입술을 핥으며 잠시 생각하다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왜 하필 나지요?"
"그것 참 지구인다웅ㄴ 질문이군. 필그림 선생. 왜하필 당신이냐?
같은 식으로 생각하면 왜 하필 우리지? 왜 하필 어떤 것이지?
그 이유는 단지 이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오. 호박에 갇힌 벌레들을 본 적이 있소?"
"있습니다." 사실, 빌리의 사무실에는 문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무당벌레 세 마리가 들어 있는 반질반질한 호박 덩이였다.
"필그림 선생,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호박 속에 갇혀 있는
것이오. 왜라는 건 없소."
외계인들은 4차원의 세계를 보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볼 수 있다. (물론 4차원의 축은 시간축이다) '원래 그러함'이라는
다소 동양철학 분위기가 나는 이 체념 혹은 관조의 미학은
어째서 우리는 아둥바둥 전쟁을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필그림은 열심히 설명하지만 외계인들은 결코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슬픈 것은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언제나, 지금도 그것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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