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 만점’ 프랑스 지하철 기관사 화제
톡톡 튀는 지하철 안내방송으로 답답한 지하철 웃음바다 만들어
난치병 어린이 돕기 위해 ‘지하철 기관사 누드달력’ 만들기도
미디어다음 / 글, 사진=김미소 프랑스 통신원
지하철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출근길 파리 시민들.
오전 8시 30분. 출근길과 등굣길에 나선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프랑스 파리 지하철 안.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던 지하철이 갑자기 멈췄다. 곧이어 당황하는 시민들 머리 위에서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앞 열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잠시 정차해 있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대도시 지하철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안내방송. 하지만 이 지하철의 독특한 안내 방송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다리느라 지루하시죠?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세요? 아니, 아직 모르고 있으셨단 말이에요? 오늘은 바로 ‘까뜨린느의 날’이에요.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날에 무엇을 하는지 아시죠? 스물다섯 살 이상의 미혼 여성은 얼른 손을 드세요. 숨기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창피해하지 마시고요.
자, 그럼 이제 그 근처에 계신 멋진 미혼 남성분들께서는 손을 들고 계신 여자분들 옆으로 가셔서 앉으세요. 네, 좋습니다. 남성분은 이제 여성분께 연락처를 물어본 후에 약속을 받아내면 됩니다. 모두 하셨습니까? 자 그럼 이제 ‘사랑의 열차’는 다시 출발합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안내방송에 갑작스런 정차로 짜증 나고 답답했던 지하철 안은 이내 웃음바다가 됐다. 시선을 회피하며 어색해했던 승객들끼리 가벼운 눈인사를 하며 웃음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승객들 불안감 없애주려고 ‘유쾌한’ 안내방송 시작
시민들 소문타고 파리 유명인사로 화제
18년째 파리 지하철공사에서 일하고 있는 방센(37).
짜증나고 무료했던 지하철 안을 웃음바다로 만든 안내방송의 주인공은 바로 지하철 기관사 방센(37).
그는 18년째 파리 지하철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처음 지하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하철 수리기술자로 일하면서부터다. 지난 92년 6개월간의 까다로운 시험 절차를 통과하고 지하철기관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처럼 톡톡 튀는 안내방송을 시작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아내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것처럼 답답해했다”며 “특히 달리던 지하철이 안내방송도 없이 갑자기 멈춰 서면 공포감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승객들의 불안감을 없애주려고 시작했던 안내방송이었지만 승객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그의 재치 있고 기발한 입담 덕분이었다. 방센의 ‘개성 만점’ 지하철 안내방송은 승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파리 시민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짓궂은 농담 때문에 종종 승객 항의받기도
메리앙은 "방센이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98년 만우절이었지요. 영화 ‘타이타닉’이 한창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었죠.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바베스역을 지날 때였어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서 역에 물이 가득 차 현재 소방서에서 물을 퍼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방송했습니다.
승객들에게 열차가 그곳을 통과해야 하니 만반의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방송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당황한 승객들의 소리가 들려왔죠. 열차 창문이 탁탁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그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금 뜸을 들였을 겁니다. 모두 농담이었으니 안심하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가셔도 된다고 말했지요.”
방센의 다소 ‘황당한’ 농담이 끝나자 열차 안에는 바로 승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다음 역에서 내린 승객 중에는 일부러 그를 보러 운전석까지 온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좋은 반응을 보였지요. 물론 항의도 있었죠. 한 분은 회사로 항의서까지 보내기도 했으니까요.”
방센이 운전하는 지하철을 자주 탄다는 메리앙(32)은 “처음 방센의 안내방송을 들었을 때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을 웃었다”며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 기관사’ 누드달력 판매해 난치병 어린이 돕기도
방센과 그의 동료들은 지하철기관사의 누드달력을 제작하고 난치병 어린이를 돕고 있다.
1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는 연예인을 공개 선발하는 ‘스타 아카데미’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방센은 이에 착안해서 파리 지하철공사(RATP)가 연예인을 공개 선발하는 ‘RATP 아카데미’를 시작한다고 방송을 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간혹 지하철공사 사무실을 직접 방문한 청년들도 있었다고 한다.
새해가 되면 방센이 어김없이 하는 농담도 있다. 지하철 요금이 50%로 인하된다는 이야기다. 놀라는 승객들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이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한다는 덕담으로 받아들인다.
프랑스 시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방센의 활약상은 안내방송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요즘 지하철 2호선 기관사들의 누드사진을 담은 달력을 판매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달력 판매 수익금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을 돕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방센은 이 아이디어를 남자스포츠 스타들의 누드달력 판매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하철 기관사가 만드는 누드달력에 관심을 갖는 협찬사는 없었다.
결국 방센을 도운 건 직장 동료인 지하철공사 조합원들이었다. 조합원들은 소자본을 출자해 ‘지하철 2호선 웃음’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를 통해 방센과 그의 동료들은 지하철기관사의 누드달력을 제작하고 난치병 어린이를 돕고 있다.
기념일에 맞춰 방송 내용 준비
“어둠 속 달리는 쓸쓸한 공간이지만, 다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기대
미디어다음이 동행한 날에도 그는 어김없이 활기찬 목소리로 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지하철은 어둠 속을 달리는 쓸쓸한 공간이에요. 그런 곳에서 모두가 다 함께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이웃들과 간단히 눈인사를 나눠보세요.”
방센은 이미 프랑스 현지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유명인사다. 최근에는 그의 안내방송을 직접 들은 연극연출자로부터 연극배우 제안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승객들과의 소통이죠. 버스와 달리 지하철은 승객과 직접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방송을 하고 나면 일부러 저를 찾아오는 승객들이 있죠. 그렇게 서로 인사를 하고 나면 기분도 좋고 제 일에 보람도 느낍니다.”
주로 아침 운행을 하는 방센이 매일같이 확인하는 것은 그날그날의 기념일이다. 기념일에 맞춰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미디어다음이 동행한 이달 초 아침에도 그는 어김없이 활기찬 목소리로 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출근길의 시민들에게 흥미로운 이벤트 하나를 제안한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성 니꼴라의 날’이에요. 제 이름은 방센이지만 오늘 하루는 니꼴라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리실 때 저한테 오시면 사탕을 나눠드립니다. 받으러 오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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